목적이 이끄는 삶
1.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골 1:16>
나는 왜 사는가?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혼란의 이유는 고민들의 출발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결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처음보는 발명품을 건넨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발명자와 사용설명서만이 발명품의 목적을 가르쳐줄 것이다.
한 여행객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 그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그리로 갈 수 없습니다. 그리로 가려면 내려가서 다른 길로 출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서는 나로부터 출발해서는 안되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6>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비결을 말하는 책들도 많이 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지침들을 따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한다면 성공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표를 성공한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절대로 같지 않다. 개인적인 목표를 모두 달성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놓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이미 너무 많은 개인적 목표와 과중한 업무에 묻혀 있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서 수천년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리라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그 모든 것은 개인적인 견해들의 총집합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참된 방법은 추리가 아니라 바로 계시(啓示)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신 것을 볼 수 있다. 발명품의 목적을 아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다행이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 속에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삶의 목적을 성경에 명확히 제시해 주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근원이시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사 44:2>
우리의 출생은 우연이 아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다. 부모님이 우리를 잉태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마음에 품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신체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선택하시고 직접 만드셨다. 인종, 피부색과 머리색 등 우리의 모든 특징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맞춤 제작하셨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5>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출생과 죽음의 시기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 (시 139:16) 또한 우리가 태어날 장소와 거주할 곳까지 계획 놓으셨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17:26>
부적절한 부모는 있어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모두 고려하고 계획을 세우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식물과 동물, 사람 하나하나 모두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렇게 우리를 계획하시고 만드신 동기는 그 분의 사랑이다.“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만드셨다.
세상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고 계셨다. 그리고 바로 우리를 지구 환경을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그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값진 걸작품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하나님은 무작정 움직이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획하시고 일하신다. 물리학자나 생물학자 그리고 우주 과학자들은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하나님의 솜씨에 놀란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우리가 존재하기에 꼭 맞게 만드셨음을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사 45:18>
이 모든 일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사랑은 하나님의 인격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우리를 만드셨다.
이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될 것이며 천문학적인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를 만드신 이유가 분명하고 우리의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하나님의 관계에서만 우리는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리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자.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3. 삶의 원동력 <전 4:4>
“나는 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동기가 자기 이웃에 대한 시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전4:4 현대인의성경)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Driven)살고 있다. 특정한 문제나 중압감, 또는 마감시간에 끌려다니면서 산다. 혹은 잘못된 믿음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다. 우리의 삶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살고 있다.
1. 많은 사람들은 죄의식에 끌려다닌다. 이들은 후회에서 벗어나고 수치심을 감추려고 삶을 허비한다. 이들은 스스로 실패자가 됨으로 자신을 처벌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과거에 갇힐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는 전문가이시다. 살인자 모세나 배신자 베드로를 위대한 지도자로 바꾸셨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2. 많은 사람들은 원한과 분노의 쓴 뿌리를 씹으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침묵하며 그 분노를 속으로 씹고 어떤 이는 폭발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둘 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보다 나 자신이 더욱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길은 과거로부터 교훈만 얻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3.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간다. 위험을 피하고 안전하게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은 종종 기회를 놓쳐 버린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가둬 놓은 감옥이다. 우리는 믿음과 사람으로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한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4.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이끌려 살아간다. 이들에겐 무언가 획득하는 욕구가 삶의 목표이다. 그러나 더 가질수록 더 행복해지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리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우리의 가치는 소유에 따가 결정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5.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간다. 이들은 항상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걱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6:24)
그러므로 이 40일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인도되고 통제되는 삶에 대해서 배우게 될텐데 그러면 올바른 목적에 이끌려 사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는가?
1. 목적을 아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어떤 목적도 없고 목적이 없다면 의미도 소망도 없다. 인생이 삶의 역경을 극복해 나가려면 소망이 필요하다. 우리가 목적을 따라 살면 절망을 이길 소망이 생긴다.
2.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목적은 우리의 활동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 인생에게는 하나님의 뜻 만을 행할 시간이 주어졌기에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없다.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 <사 26:3현대인의성경>
3. 목적을 알면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게 된다. 빛을 한 곳으로 모으면 쇠도 자를 수 있는 레이저가 된다. 우리가 목적에 따라 선택적으로 살면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사소한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4.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가 유발된다. 목적은 열정을 낳는다. 만일 목적이 없다면 심지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까지도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다.
5.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기억되기 위해서 보내어진 것이 아니라 영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어졌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물으실 것이다. 1)너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고 2)너는 내가 준 것들로 무엇을 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질문에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자.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4.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전 3:11>
현재의 삶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실제의 공연을 위한 최종 연습에 불과하다. 지구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영원한 시간 사이에 끼어 있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어느 날 우리는 지구상의 시간과 결별하겠지만 그것은 우리 존재의 마지막은 아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영원한 것은 두 가지 뿐, 천국과 지옥이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영원을 어디에서 보낼 것인지가 결정된다. 우리가 지금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삶에서 많은 것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영원한 빛 가운데 살면 우리의 가치관이 변한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되고, 명예나 부, 또는 일의 성취감이나 쾌락보다 인간관계와 인격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 또한 유행이나 대중적인 가치관이 별 하잘 것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알게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빌 3:7>
만일 이 세상의 삶이 우리의 전부라면 단지 인생을 즐기면 된다. 그리고 그 행동들에 대한 결과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세가 없다면 우리의 착함과 성실함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모든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머리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의 위대함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개미에게 인터넷의 편리함과 사용법을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영원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신다. 천국은 더 이상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나라이며 거기서 우리는 믿음의 형제 자매와 재회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언젠가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목적을 갖고 계시며 그것은 지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33:11>
이 엄청난 영생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막연히 두려워하고 생각하기도 싫어한다. 그러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니다. 사람들이 영생을 생각하는 유일한 순간은 장례식 때이므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전 7:2)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내는 9개월이 다음 삶을 위한 준비였듯이 현재의 삶은 다음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7)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을 우리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한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5.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약 4:14>
당신은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삶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투자하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며,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계에 얼마만큼 가치를 두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제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만드신 목적에 부합하기 위하여 세상적 관점을 버리고 성경적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경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삶에 대한 모습을 세 가지 비유로 제시한다.삶은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며, 임시로 맡겨진 임무이다. 우선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시험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격, 믿음, 복종, 사랑, 투명성 그리고 충성에 대해 끊임없이 시험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시험에 실패했고 요셉, 다니엘, 에스더 등은 시험을 통과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시험이다. 우리의 인격은 이러한 시험에 의하여 개발되고 다듬어진다. 하나님은 사람, 문제, 성공, 갈등, 질병 심지어 날씨 등에 반응하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또 우리는 미루어진 약속, 이유없는 비난, 응답받지 못한 기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통해서 시험을 받는다. 시험들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 32:31>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홀로 두심으로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하게 하는 이것은 가장 차원 놓은 시험이다. 이처럼 삶이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매일이 중요하고 매순간이 인격을 개발하며 매 사건이 하나님을 의지할 성장의 기회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기를 바라시고 감당할 힘도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2> 둘째로 생각할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은 위탁받은 것이다. 시간, 에너지, 능력 기회, 관계 그리고 자원은 우리가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잠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고 우리는 그의 청지기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이 땅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유란 예전에도 있던 것이고 우리가 이 땅을 떠난 후에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잠시 빌려서 머물다 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를 잘 관리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귀한 분이 멋진 별장을 빌려주면서 내집 같이 편히 쉬라고했을 때 사실은 조심하고 아껴야 함을 우리는 잘 안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끝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것을 어떻게 잘 관리했느냐를 평가받을 것이며 그에 따라 영원한 세계에서 상급을 받을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칭찬”을 받을 것이며 둘째로 “승진”하게 될 것이다. 더 큰 것으로 맡기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 것이다.
하나님이 위탁하신 것 중 대표적인 것 하나는 돈이다. 더 쉽게 말해서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우리 믿음과 직결된다는 말이다. 만일 주께서 우리를 신뢰하시면 더 많이 맡길 것이며 더 많이 맡기시면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실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6.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 <시 39:4, 찬송 208장>
당신은 삶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삶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삶은 첫째 시험이고, 둘째 위탁받은 것이며, 셋째로 지구상에서의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
성경은 삶을 안개, 한번 내쉬는 숨, 날아가는 화살 등에 비유한다. 이 짧은 삶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영생에 비해 땅에서의 삶이 짧다는 것과 지구가 임시 거주지라는 사실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외국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성경은 순례자, 외국인, 나그네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나는 이방에서 객이 되었사오니”(시119:19)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우리의 정체성(Identity)는 영생에 있고 우리의 모국은 천국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의 소유와 집착을 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관에 빠지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부르신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약 4:4>
적국에 대사로 간 사람은 적국 문화에 익숙하여야 하겠지만 만일 그 나라를 본국보다 더 사랑한다면 배신자가 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크리스찬들이 그들의 왕과 왕국을 배신했다. 그래서 성경은 권면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세상은 분명 이전보다 살기 편리해졌고 인생으로 진정한 목표를 망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삶은 시험이며 삶은 위탁받은 청지기이며 삶은 잠시라는 사실을 명심할 때만 세상 즐거움을 이길 수 있다.
이 세상이 우리의 궁극적인 집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왜 성도에게 불합리한 일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왜 때로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지를 설명해 주는 유일한 비결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않게 하시려고 상당한 불만 요소를 남겨 놓으신 것이다.
물고기가 물이 아니면 불행하고 독수리가 날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완벽한 만족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완벽한 행복을 계획해 놓으셨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18> 신실한 세례요한이나 바울도 감옥이 갇히고 처형당했다. 수백만 성도들이 미련없이 순교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3,16> 미국 대통령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노 선교사의 실망과 하나님의 위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삶이 힘들어지고 의심의 구름이 몰려오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게 될 때 우리는 아직 집에 온 것이 아니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라. 죽음이란 우리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집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7.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 <롬 11:36, 찬송 30장>
온 우주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존재 목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미생물에서부터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드러내셨다. 에덴동산에서, 애굽에서, 광야에서, 성막과 성전에서 나타내셨다. 그리고 현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교회를 통하여 나타내신다. 마지막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분히 비취시므로 충분한 빛을 공급하신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3>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님의 영광은 가장 잘 드러난다.
어느 누구도 태양을 더 빛나도록 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어더한 것도 더할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의 영광을 깨닫고 존귀히 여기며 선포하는 그것을 우리는 명령받았을 뿐이다.
불행히도 우주 전체에서 단 두 가지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는데 그것은 타락한 천사(사탄)들과 인간들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이고 타락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 이제 우리는 삶의 최고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다음 5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1)우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린다.
예배란 하나님 그분을 즐기는 것이다. 즉 예배의 동기는 의무가 아닌 사랑과 감사, 즐거움이어야 한다. 또한 예배는 찬양하고 말씀듣고 기도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살아드리는 모습이다.
2)우리는 다른 믿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서 영광을 돌린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35>
3)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영광을 돌린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방법이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비슷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11>
4)우리의 은사로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우리를 독특한 능력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만 위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주신 것이다.
5)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함으로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인생들에 대한 당신의 계획이 비밀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그들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은 커다란 특권이다.
이제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나 자신의 목표와 기쁨을 위해 살 것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급을 바라보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
<요 12: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8.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계 4:11 찬송 67장>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필요가 없었으나 당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시기를 작정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이다. 이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면 더 이상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토록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셨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처럼 감정을 가지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며 연민을 느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한다.
1.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부른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이 예배이다. 예배는 다이아몬드처럼 다양한 모습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시 147:11>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2. 예배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만일 예배가 좋았다거나 유익하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느꼈다는 의미라면 가능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인간적인 재미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예배의 목적이 아니다.
3. 예배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자체이다.
교회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드리는 예배만 예배가 아니다. 성경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심지어 침대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찬양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처음 하는 행동이어야 하고 밤에 눈을 감을 때 하는 마지막 행동이어야 한다. 다윗을 말하였다. <시 34:1>“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우리가 성경이 죄로 규정하지 않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과 기쁨이 드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은 예배가 될 수 있다.성경은 말한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틴 루터는 농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유를 짤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한 것처럼 하며 끊임없이 그와 대화함으로써 할 수 있다. 이것이 생활로 예배하는 방법이다. 마치 처음 연애를 시작한 젊은이가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애인을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안에 빠지는 이것인 진정한 예배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9. 하나님를 미소짓게 하는 것 <히 11:7 찬송 512장>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목표이다. “당신의 종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시고”<시 119:135 공동번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므로 그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엡 5:10>“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 중에 노아가 있다. 모두가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여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며 멸망시켜버리려고 하셨을 때 노아가 하나님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 나와 여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노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미소짓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1.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가장 사랑할 때 미소지으신다.
노아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도 주님을 사랑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제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호 6:6>“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교제)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신다.
<마 22:37-38>“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니”
2.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 지으신다.
노아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1)그는 비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2)그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3)그는 모든 동물을 다 모으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 지으신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의 크기와 모양,재료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셨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다.(창 6:22) 이처럼 모든 것에 정확하게 순종한 것이 바로 온 마음을 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조건을 달지 않고/ 지체없이/ 무엇이든 순종해야 한다. 나중에 하겠다고 하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 14: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4.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미소지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의와 감사를 표현할 때 미소 지으신다. 노아는 아무도 제사하지 않았을 때 예배드렸고 방주에서 나온 후 처음 한 행동이 제사드린 것이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찬미의 제사’(히 13:5)와 ‘감사의 제사’(시 116:17)을 드리라고 가르친다. 이미 구약시대에도 다윗은 찬양했다. <시 69:30-31>“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시 68:3>“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5.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을 사용할 때 미소 지으신다.
노아에게 하신 마지막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소위 세속적이 일들이다. 하나님은 영적일 일 뿐 아니라 먹고 쉬고 일하는 모든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수천가지의 능력으로 노래하고 공부하고 기계를 수리하고 장사하고 청소하고 농사지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세속적인 능력이란 없다. 단지 오용할 뿐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가 잠자는 모습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성숙할 때를 기다려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연약한 체질임을 아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첫 번째 목표로 삼자.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0. 예배의 중심 <롬 6:13, 찬송431장>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다 드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해서 이기라고 배웠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 자신은 내어 드리고 항복하는 것은 예배의 중심이다.
우리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 진정한 예배가 가능하다. 이것은 헌신, 십자가, 위탁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어땠건 온전히 순종할 때 가능하다. 95%로는 안된다.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소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이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위해 무슨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안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릴 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표현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고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한단다. 나는 너 없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신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폭군이 아닌 구세주, 독재자가 아닌 친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교만이다. 이것은 아주 오랜 전통이 있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꾐에 넘어갔던 그때부터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질투하고 시기하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아닌 인간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면 오히려 사탄과 같아진다.
한편,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은 숙명론적인 단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게으름에 대한 핑계도 아니다. 이성적인 생각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로봇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성격을 억누르는 것도 아니다. 내 기질과 성격에 맞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내어드린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했다.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을 모르면서 따라갔고 요셉은 일이 꼬이는 이유를 모르면서도 오랜 기간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에 가장 어려워하는 영역이 있다면 돈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다. 또한 많이 벌어 편안히 은퇴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온전히 헌신한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할 때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항복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마리아는 차분히 대답하였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롤 내게 이루어지이이다.”(눅 1:38)
사람들은 결국 무엇인가에 항복한다. 돈, 욕망, 기타 모든 것에 항복하는 것은 자아를 섬기는 수단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을 만들어 섬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삶은 드리는 것은 감정적인 충동이 아닌 이성적인 결정이요 순종적 행동이다. 우리가 헌신하려고 결심하면 유혹이 있다. 우리는 [산 제물]이기 때문이다. 산 제물은 제단에서 내려올 수 있다. 그래서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 한다. 아니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죽어야 한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1.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기 < 롬 5:10-11, 찬송 487)>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친구가 되시기 원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원래 에덴동산에서는 예식도 종교도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었으나 타락한 이후 단지 몇 명만이 이 특권을 누렸다. 모세와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셨고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욥과 에녹, 노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으셨다.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루실 때 성전 휘장은 갈라졌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다. 종은 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친구는 친밀한 교제와 비밀 정보를 나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 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친구로 원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하여 6가지 비밀을 알 수 있다. 친구되기1: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우정은 대화ㅣ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주일 아침 혹은 매일 새벽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 대화, 활동, 생각에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쇼핑할 때, 운전할 때, 업무를 수행할 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저자 로렌스 형제는 프랑스 수도원의 조리사였다. 그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였다. 하나님과의 친구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은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즉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예배가 참석해야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태도였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산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로렌스 형제는 긴 문장과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말고 “숨 기도" (Breath Prayer)를 한 것을 제안하였다. 한번 숨을 내어 쉴 때마다 호흡과 함께 고백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께 의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삽니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발전시킬 수 있는 습관이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시간마다 종을 쳐서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곤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계속적으로 인식하는 그것이 삶으로 예배하는 방식이다. 친구되기2: 계속해서 묵상함으로 묵상은 성경 말씀을 계속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우리가 걱정하는 원리과 같다. 같은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걱정이다. 그러므로 걱정하는 방법을 안다면 묵상하는 방법은 이미 터득했다. 우리의 관심을 돌려 성경말씀을 더 묵상하면 우리의 걱정거리는 줄어든다. 욥은 고백했다. <욥 23:12> “내가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또 다윗도 고백했다. <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묵상은 하나님과 친구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묵상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 다니엘, 바울과 여러 제자들과 당신의 비밀을 나누셨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은 우리와도 당신의 비밀을 나눌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2. 하나님과의 우정 키워가기 < 약 4:8, 찬송 506)>
우리는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다. 다른 우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우정을 키워가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친구되기 3: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우정을 깊이 쌓는 첫 단계는 완벽한 솔직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함을 원하신다. 성경 속의 그 누구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이시다.(마 11: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실 것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고 다윗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비난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이 백성을 인도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욥은 고난당하는 괴로움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옹호하시고 솔직하지 않은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때 감정에 솔직할 수 있게 하시려고 시편을 주셨다. 예배의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은 한탄, 분노, 의심 두려움, 감사, 찬양, 믿음의 고백들이 모두 들어 있다. <시 142:2>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이렇게 미려오는 의심과 싸운 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의심을 표현하는 것은 때때로 하나님과 더 친밀해질 수 있는 첫 걸음이 된다. 왜냐하면 의심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되기 4: 믿음으로 순종하기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마다 심지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우정은 깊어진다. 예수님은 순종이 친밀함의 필수 요소라고 말씀하셨다.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리의 순종은 의무감이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순종한다. 주님은 순종을 제사하는 것보다 좋아하신다.(삼상 15:22) 우리는 대단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자주 찾아오는 작은 일들에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친구되기 5: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친구는 상대방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함께 마음을 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함께 슬퍼하며 마음을 써야 한다. 다윗은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 바로 자기가 모욕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되찾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친구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친구되기 6: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우정을 소망해야 한다. 다윗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간절히 소망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과 가까와 질 수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연히 아닌 우리의 선택이며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당신의 가치를 포기할 준비가 되었는가? 혹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C.S.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 <렘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 막 12:30, 찬송 511 >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일부를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영혼, 생각, 힘의 모두를 요구하신다. 그는 부분적인 순종, 남는 시간과 돈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온전한 헌신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에는 4가지 특징이 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정확할 때 기뻐하신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는 하나님을 ...라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예배드리고 싶은 모습의 하나님에 대해 나눈다. 하지만 우리가 대하기 편하고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을 예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예배는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잘 알고 예배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진실할 때 기뻐하신다.
“영으로 예배하라”고 할 때 영은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에 반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음(Heart)과 영혼(Soul)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예배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바른 말을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는 찬양은 찬양이 아니다. 찬양의 가사는 옳고 성경적이나 내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 때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내용)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를 보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은 감정인데 예배드릴 때 그 감정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했으나 잘못된 예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예배를 마음 없이 드리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3. 하나님은 사려 깊게 예배드릴 때 기뻐하신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4번이니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생각 없이 찬송하고 상투적인 말로 기도하며 별뜻없이 ‘할렐루야(주를 찬양하라)’를 외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중언부언이다.
성경적 어휘도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과용하면 중언부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번역을 참고해 가면서 더 풍부하게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노력해보자. 쉬운 예로 지금 당장 찬양, 할렐루야, 감사, 아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해보라.
또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구체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를 10번 반복하면 나는 그가 나를 놀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왜 나를 존경하는지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야 진심으로 받을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예배에 참석한 불신자들도 고려해야 한다.
<고전 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4.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현실적일 때 기뻐하신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한다. 너의 영을 내어 놓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네가 가진 것을 내 놓으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나는 오늘 못 가. 하지만 마음만은 참석할게’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환영하지 않는다. 만일 내 몸이 그곳에 없다면 나도 그 곳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죽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 제물, 즉 살아있으면서 예배드리는 것이다. 삶의 현장 곳곳에서의 헌신이 우리의 예배를 더욱 예배되게 하는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4.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 사 8:17, 찬송 208 >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는 쉽다. 하지만 하나님이 몇 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하는가? 가장 깊은 경지의 예배는 시련 속에서 감사하며 시험 속에서 신뢰하고 멀리 느껴지는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는 종종 시험받는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리던 다윗도 그런 경험을 했다. <시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항상 임재를 느끼도록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때로 하나님은 일부러 얼굴을 숨기신다. 기도해도 변화가 없고 죄를 고백하고 금식해도 아무 영적 느낌이 오지 않는 슬럼프는 왜 오는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정상적인 영적 성숙의 필요한 과정이다. 욥은 그러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했다.
<욥 23:8-10>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초신자일 때 하나님은 확신을 주시고 자기중심의 기도에도 응답하신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서 이러한 감정에 의존하는 것을 제거하신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눈물이 가득 고인채로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 욥처럼 하면 된다.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 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1.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말하라.
하나님께 마음을 모두 털어 놓으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 분노, 두려움, 슬픔, 혼란 그리고 궁금증들을 모두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을 맞추라.
그분은 한결같은 분이시다. 상황과 감정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특성에 매달리라.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변의 진리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라. 그분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3.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지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깊은 성숙의 단계로 이끌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감정에 바탕을 둔 우정을 그 깊이가 얕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 때문에 마음에 어려움을 당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하나님의 특성을 바꿀 수는 없다.
4.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기억하라.
다른 일들이 생각나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만 하더라도 우리의 남은 생애 동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예수님은 못 박히시기 전에 옷이 벗기고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 되셨으며 조롱과 경멸을 받으셨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동안 하나님은 외면하셔야 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갖게 하시려고 그분은 모든 것을 버리셨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영원히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5.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 요일 3:1 , 찬송 411 >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하나님은 가족을 원하시고 우리가 가족이 되도록 만드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 갖고 계시는 두번째 목적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첫번째 목적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히 그분과 함께 통치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관계를 소중히 여기신다. 삼위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족으로 즉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표현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존재해 오셨기에 외롭지 않으시지만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로 하셨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된다. 또한 모든 믿는 사람들은 형제와 자매가 되고 교회는 영적 가족이 된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방법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 뿐이다. 조건은 오직 믿음이다. 영적인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것이기 때문에 혈육 관계보다 중요하다. 혈육 관계의 가족도 멋진 선물이지만 이혼, 먼 거리, 죽음 등으로 깨어진다. 그러나 영적인 가족의 관계는 영원하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가족의 재산을 나누어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받을 유산에는 무엇이 포함되었는가?
1)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완전히 변화하여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3) 우리는 모든 아픔, 죽음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4) 우리는 상급을 받을 것이고 섬김의 자리에 재배정될 것이다.
5)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유산인가? 우리의 영원한 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며 순결하고 영원하며 보호되고 있다. 건강한 가족은 가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구성원들이 그 가족의 일원으로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선포하는 의식이 바로 세례이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동참함으로 옛 삶이 죽었음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의식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축하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세례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면에서 로마교(천주교)는 잘못 가르치고 있다. 세례는 결혼반지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내면적인 헌신의 가시(可視)적 표시일 뿐이다.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는 상황에서 동시에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고 특권이다. 그 어떤 것도 이에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며 불안하다고 느낄 때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가족인지를 기억하라. 우리는 크리스챤(Christian)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의 가족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6. 가장 중요한 것 < 고전 13:3 , 찬송 414 >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이 우리가 이 땅에서 배우기를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분의 모든 명령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기심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본성에 정반대 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평생동안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하되 특별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가족으로서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다.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 삶에서 하나의 좋은 부분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랑은 우리의 최우선 순위여야 하고 최고 목표여야 하며 가장 큰 야망이어야 한다. <고전 14:1 현대어성경> “사랑을 최고의 목표로 삼으십시오.”사랑없는 삶을 가치가 없다. 바울은 말한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십계명 중에 후반부 6개는 모두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요약하셨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성취가 아닌 관계다. 그러나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겐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다. 관계를 위해서 우리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사랑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가 말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에 얼만큼 사랑을 쏟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임종할 때 아무도 자기의 졸업장 금메달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는다. 생애가 끝날 때 우리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사랑하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사람이 전부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좀 더 빨리 깨닫는 것이 현명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지 말자. 사랑이 삶의 목표가 되는 세 번째 이유는 영원한 나라에서 평가받을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도를 측정하실 때 인간관계로 하신다. 주님은 직업, 취미, 성취도, 입금계좌 등을 묻지 않으신다. 사람에 대해 물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마 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제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시간 사용으로 결정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시간을 누군가에게 주면 한정된 내 삶을 그에게 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간을 줌으로 증명해야 한다. 우리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희생하는 것이고 이 희생이 사랑의 본질이다. 우리가 사랑하기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왜냐하면 그 기회가 언제까지나 있을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오늘, 바로 지금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7. 우리가 있어야 할 곳 < 엡 2:19, 찬송 245 >
우리는 믿어야 할 뿐 아니라 어느 곳에 속해야 한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창 2:18) 그 누구도 혼자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다른 믿는 사람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영원히 서로에게 속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다 잘린 손가락, 발가락은 몸에서 가치가 없다. 우리가 교회에서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면 우리의 영적인 삶은 시들기 시작하고 결국 영적인 모습은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영적으로 침체되는 사람의 첫 번째 증상은 교회를 잘 나가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울 것이고 어둠의 권세가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교회는 파괴될 수 없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셨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지칭할 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눈에 보이는 지역교회를 의미했다. 즉 신약성경은 신자가 교회에 속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만일 신자들이 교회에 속하지 않는 경우는 범죄로 인하여 처벌(치리)받고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교회가 없는 신자는 무리를 떠난 양이며 가족이 없는 고아이다. 오늘날은 독립적인 개인주의 문화가 되었다. 한 지역교회에 대한 소속감 없이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면서도 좋은 성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신다. 교회가 성도에게 왜 필요한가?
- 교회 가족은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챤임을 증명해 준다.
- 교회 가족은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고립에서 건져 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교실과 같다. 성경적인 교제는 예수님에게 뿐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교회 가족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 준다. 방관자의 입장에서 수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신약에는 “서로”라는 말이 50번 이상 등장한다.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고 짐을 나누어지고 권고하고 문안하며 존경하고 용서하고 복종하며 헌신하는 것 등을 제안한다.
-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가족 안에서 독특한 역할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며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 세계 전역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육신의 몸으로 일하셨지만 오늘날에는 영적인 몸을 사용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과 손, 발, 눈, 귀가 되어서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한다. - 교회 가족은 타락의 유혹에서 지켜준다. 그 누구도 유혹에 대한 면역이 없다. 상황이 되면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서로 책임을 점검하게 하셨다.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또 교회에는 양무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지도자를 세우시고 돌보도록 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교회에서 멀어지고 마음이 떠난 사람들을 좋아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 기족 안에서 공급받고 보살핌 받으며 건강하게 성장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거듭나면서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지역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듯이 지역교회에 속하여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8. 삶을 함께 경험하기 < 시 133:1, 찬송 369 >
삶은 공유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삶을 경험하기를 바라신다. 성경은 이것을 "교제"라고 부른다.
오늘날 “교제”는 성경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교제는 가볍게 대화하며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제는 함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발견되는 ‘서로’에 대한 명령들이 교제 안에 포함되어 있다. 교제는 작은 그룹에서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더 많은 제자들을 택할 수 있었지만 소수를 두고 사역하셨다. 주님은 소그룹을 두고 약속하셨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러나 한편으로 소그룹에 속했다고 저절로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교제와 그렇지 못한 교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1. 진정한 교제에서는 사람들이 진실함을 기대한다.
진실한 교제를 위해서는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진실하게 이야기할 때 가능해진다. 상처를 나누고 감정을 표현하고 실패를 고백하고 약점을 깨달으며 기도를 부탁한다. 어떤 그룹에서는 인간적이고 진실한 분위기 대신 가식적인 모습으로 얕은 대화만을 나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한 대화를 나눌 때 진정한 교제를 경험한다. <요일 1:7-8>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2.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상호 의존한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디자인하신 모습은 교회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몸에서 모든 부분은 서로에게 의존한다. 신약에서 ‘서로에게’ 또 ‘서로를 위해’ 살라는 명령이 50번 이상 등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노력해야 한다.
3.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공감한다.
공감한다는 것은 고통에 동참하고 나누는 것이다. “네가 겪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네가 느끼는 것을 잘못이 아니야.” 하는 것이다. 이 공감을 통해서 이해받고 감정의 정당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교제에는 단계가 있다. 기초적인 나눔의 교제는 말씀을 함께 공부하는 교제이다. 보다 깊은 섬김의 교제는 선교 여행이나 봉사활동을 동참하는 교제이다. 가장 깊은 친밀한 교제의 단계는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고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에게 서로가 필요할 때는 심각한 위기와 깊은 슬픔을 지날 때이다. 상황이 악화되어 우리 믿음이 무너지려고 할 그 때 믿음의 친구를 필요로 한다고 욥은 울부짖는다.
<욥 6:14>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4.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자비를 경험한다.
교제의 장소, 은혜의 장소에서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드러나지 않고 덮어진다. 자비가 정의보다 강할 때 교제는 일어난다. 우리 모두에게 자비가 필요하다. 주님은 명령하신다.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동기가 된다.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나의 에너지를 누군가에게 상처주는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자비를 베푸는 데 사용할 것인가?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는 없다. 공동체 안에서 삶을 함께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19. 공동체 가꾸기 < 행 2:42, 찬송 249 >
공동체는 헌신을 필요로 한다. 성령만이 성도의 진정한 교제를 가능케 하지만 한편 성령은 우리의 헌신을 사용해서 역사하신다. 즉 서로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를 가꾸고 싶다면 몇 가지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위험한 일을 감수해야 한다.
1.공동체를 가꾸려면 정직해야 한다.
우리는 문제를 덮어버리거나 모른척 하고 싶을 대로 사랑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한다. 많은 공동체가 바로 이런 이유로 와해되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엡 4:15) 바울을 말했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사람들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고 문제를 덮어버리곤 하는데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갈등만 증폭되게 된다. 교회의 진정한 교제는 솔직함에 달려 있다. 내면에 깔려 있는 장벽들을 맞서고 허물 생각이 없다면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다.
그러나 솔직함이란 하고 싶은 말을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례함이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간과 방법이 있다. <잠 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2.공동체를 가꾸려면 겸손해야 한다.
독선적이고 교만한 것은 빠르게 공동체를 파괴한다. 교만은 사람 사이에 벽을 쌓는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교만은 우리가 성장하고 변화받고 치유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은혜를 가린다. 내가 교만할 때마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다.
<롬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겸손이란 나를 낮게 생각하는 것이며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
3.공동체를 가꾸려면 공손해야 한다.
공손함은 서로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며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을 인내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가 호텔의 Boy나 레스토랑의 Waiter가 될 것이다. 모든 교회, 모든 소그룹에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 있다. 이들은 남을 화나게 하는 버릇이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술이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는 특이한 버릇이 있고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특성이 있다. 이것을 알면 공손해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4. 공동체를 가꾸려면 비밀을 지켜야 한다.
형제들이 죄를 지을 때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밀을 지켜준다는 것은 같지 않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그룹 안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구성원들만 알고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것에 대해 험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5. 공동체를 가꾸려면 자주 만나야 한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는 자주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깊은 교제를 위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일 만났다. 우리는 모임을 최 우선 순위에 두고 모여야 한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0. 깨어진 관계 회복하기 < 고후 5:18, 찬송 543 >
관계들은 항상 회복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불화나 상처 혹은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 관계를 깨뜨리기보다는 유지하는 노력을 하기 원하신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계 회복의 사역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고후 5:18) 그래서 신약의 상당 부분이 우리에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할애되어 있다. 즉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우리의 능력은 영적인 성숙의 척도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이 우리가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마 5:9) 화평케 하는 것은 우리가 개발하여야하고 개발할 수 있는 중요한 기술 중 하나이다. 그러면 어떻게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
1.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께 이야기하라.
친구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신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또 관계들을 놓고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면 관계는 더욱 원만해질 것이다.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분노와 상처, 불안의 감정을 모두 쏟아 놓으라.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당황해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눈을 먼저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오는 우리를 반기신다.
2. 항상 먼저 다가가라.
우리가 피해자이건 가해자이건 상관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대하신다. 상대방이 손 내밀기 기다리지 말라. 관계회복은 예배보다 우선되며 중요하다.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재빠르게 행동하면 영적 손실도 적어진다. 시간은 갈등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상처만 곪을 뿐이다.
회복을 위한 만남에는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다. 피곤하거나 마음이 급하거나 방해받는 시간을 피해야 할 것이다.
3.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라.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입보다는 귀를 더 많이 사용하라. 이해되지 않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방해하지 말고 그냥 들으라. 감정이 격한 사람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처음부터 상대방이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충고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인내하며 들어주는 것은 희생이다. 특히나 그 분노가 근거없는 것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갈보리의 주님을 생각하자. 그 분노와 모욕을 사랑으로 인내하신 그분을 생각하자.
4. 나에게도 잘못이 있음 고백하라.
진정한 관계 회복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눈의 들보를 빼어야 형제의 눈의 티가 보일 것이다. 자기 시각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상대방의 눈으로 보게 된다.
5.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하라.
누구의 잘못인가를 가리려고 너무 노력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말이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는다. 만일 공격적으로 말을 하면 듣는 사람도 방어적이 된다.
<잠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6. 할 수 있는 한 협력하라. 평화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때로는 자존심일 수도 있고 또 자기 중심성일 수도 있다. 교제를 위해서는 양보하고 상대방에게 맞춰야 한다.
7. 해결이 아닌 화해를 강조하라.
해결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화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화해에 초점 맞추면 문제는 중요성을 잃어버린다. 그렇다고 문제데 대한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화해는 문제 자체가 아닌 표면에 떠오른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1. 교회를 보호하기 < 엡 4:3, 찬송 246>
교회의 하나됨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교회의 하나됨이란 신약에서 천국이나 지옥에 관한 얘기보다 더 많이 언급될 만큼 중요하다. 하나됨은 교제의 핵심이다. 하나됨이 파괴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심장이 찢겨져 나가는 것과 같다. 하나됨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우리도 연합하기를 원하신다. 삼위일체는 희생적인 사랑, 겸손한 이타주의 그리고 완벽한 조화의 모범이시다.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아버지도 자녀들이 서로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우리의 하나됨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셨다. (요 17:20-23)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면 교제를 나누는 곳, 속한 교회의 연합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1. 서로의 차이를 공유하라.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한분 주님, 한 몸, 한 목적, 한 아버지, 한 성령, 한 소망, 한 믿음, 한 세례, 한 사랑을 공유한다. 우리는 같은 구원, 같은 미래를 공유한다. 우리에게 다른 인격, 배경, 인종, 취향을 갖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 차이를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즐겨야’ 한다. 하나님은 획일성이 아닌 하나됨을 원하신다.
2. 현실적인 기대를 하라.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상적인 교제와 현실의 괴리를 발견한다. 이럴 때 절망하고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그런 불완전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때로 다른 신자가 나를 실망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제를 파괴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 구성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지상에서 완벽한 교회를 찾을 수 없다. 만일 완벽한 교회가 있다면 불완전한 우리는 그 모임에 갈 수 없을 것이다.
3. 비판하기보다는 격려하라.
공동체에 기여하기보다는 비판하는 것이 쉽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형제를 고소하던 자’라고 부른다. 우리와 아무리 달라도 크리스찬은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4. 험담을 귀담아 듣지 말라.
험담을 듣는 것은 훔친 물건을 선물받는 것이며 공범자가 된다. 누군가 험담을 하면 용기를 내어서 “저의 귀를 쓰레기통으로 취급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양 우리 속에서 늑대가 아닌 다른 양에게 공격받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성경은 이런 자를 경계했다.
<잠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를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5.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익히라.
어제 배운 방법을 100% 활용하라. 문제가 생기면 상대방에게 직접 말하기보다는 제3자에게 불평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성경은 말한다.
<마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7. 목사와 지도자들을 지지해주라.
완벽한 지도자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됨을 지킬 책임과 권위를 주셨다. 목사들은 갈등을 중재하는 유쾌하지 않은 일을 맡았다. 또 모두를 기쁘게 해야 하는 불가능한 일을 맡았다. 이것은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2.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 롬 8:29, 찬송 505>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예수님처럼 만드는 것이다.
<창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또 우리는 지적인 존재이며 선악을 구분하는 도덕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잃어버렸다. 아버지가 자신을 닮은 아들을 좋아하듯이 하나님의 소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닮아야 할 완전한 모습은 예수님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러나 한 가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다.(창 3:5) 하나님은 우리가 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의 도덕성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엡 4:22-2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각자의 성격 스타일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성격 위에 그리스도의 인격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개발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의 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기적이나 어떤 격렬한 힘을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느낄 수 없이 조용히 일하신다. 그분은 세미한 음성처럼 우리를 가볍게 건드리신다.
1.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협력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믿음의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 드러난다. 요단강에 발을 잠글 때 강물이 멈췄고 여리고을 돌았을 때 성벽이 무너졌다.
구원은 노력없이 얻어졌지만 성화는 노력으로 얻어진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를 닮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하고 새롭고 거룩한 습관을 발전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어야 한다. 우리의 성품이란 우리가 습관을 모아 놓은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당신의 말씀, 사람들, 그리고 상황을 이용하신다.
이 세 가지는 꼭 필요한 것들이다. 말씀은 성장에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고 사람들은 우리를 지원해주며 상황은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성장에 필요한 것은 성경공부와 기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개입되지 않고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적이 아닌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산꼭대기의 수도(修道)로 성장한다는 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숙한 모습이란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길고 느린 성장의 과정이다.
영적인 성숙은 즉각적이거나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라 남은 생애 내내 이루어질 점차적인 발달 과정이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영적인 변화는 평생 걸리며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도 않는다. 이 변화는 우리가 천국에 가거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완성된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는 어떤 태도로 하느냐에 관심을 가지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생으로 갈 때는 직업이 아닌 성품과 인격을 가지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려면 문화를 거슬러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개인의 만족과 안정을 위해 살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는 이 일에 평생을 헌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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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성장하는 방법
< 엡 4:13-15, 찬송 507 >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소원은 우리가 성숙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갖는 것이고 사랑과 겸손한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많은 크리스찬들이 나이는 들지만 성장하지 않고 있다. 영적으로 계속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빨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장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헌신이 필요하고 성장하려고 몸부림쳐야 되는 것이다.
제자도란 헌신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헌신이 우리의 모습을 결정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디에 헌신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헌신하기를 두려워하며 세월을 허송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반만 헌신하거나 또는 세상의 목표들에 헌신하고 있다. 모든 선택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르므로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 성령께서는 우리의 헌신을 도우신다. <빌립보서 2:12-13>은 영적 성장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성경 구절이다.
<빌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기에서 “이루라(work out)”는 말은 우리의 책임을 말하며 “안에서 행하시는(work in)”은 하나님의 역할이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work for) 일하지 않는다. 마치 운동 선수가 몸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몸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운동하는 것과 같다. 농부들이 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땅을 개발하기 위해서 경작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주신 구원을 진정한 구원히 되도록 개발하는 것이다. 단련하지 못한 몸, 경작하지 않는 농토가 가치가 없듯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구원은 무가치하다. 자동 조종 창치 바꾸기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뒤에는 우리의 생각이 있다.
<잠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어떤 호수에서 자동조종장치가 동쪽으로 가도록 설정된 고속 모터보트를 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보트를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려고 물리적으로 키를 잡아 돌린다면 잠시 동안은 버티겠지만 결국 힘이 빠져 키를 놓고 말 것이다. 그러나 쉬운 방법이 있다. 자동조종장치를 서쪽으로 바꾸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성장으로 가는 첫 단계는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는 일을 성경은 “회개”라고 부른다.
우리가 회개하여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전환하는 첫 부분은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을 중단하는 것이다. 즉 어린아이처럼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만 위해서 살던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부분은 성숙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며 생각하는 것이다.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영적인 성숙은 성경지식을 아는 것 만이 아니라 교리와 일치되는 행동과 삶이 포함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여기에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도구들을 다음 몇 장에 걸쳐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4. 진리로 인한 변화
< 딤후 3:16-17 찬송 241 >
진리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영적인 성장은 거짓을 진리로 대체시키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만드신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그분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없이 우리는 살아 있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불어넣고, 믿음을 만들며, 변화를 일으키고, 귀신들을 떨게하며, 기적을 행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인격을 형성하고, 유혹을 이기며, 희망을 주고, 권세를 주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욥은 고백한다. <욥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영적인 영양분이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성경책은 어느 시대보다 많이 인쇄되었지만 수백만의 크리스찬들이 영적인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말씀을 공급받는 것은 기도보다 앞서고 전도보다 봉사보다 앞선다. 말씀 안에 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결심해야 한다.
1. 그분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성경이 삶의 권위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결정할 때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신뢰할 수 없는 기준을 근거로 결정하는 것이다. 문화(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전통(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 이성(논리적이니까), 감정(옳게 느껴지니까) 이 네 가지는 인간의 타락으로 망가진 것들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은 성경이 우리 삶에서 최고 권위가 되게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결정할 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하로 질문하는 것이다.
2.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1)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닫힌(굳은) 마음, 피상적인(얕은) 마음, 혼합된(잡초가 있는) 마음이다. 설교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회개해야 한다.
2)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성경 대신에 얄팍한 일간지를 읽는다. 텔레비전은 3시간 보고 성경은 3분도 보지 않으면서 영적인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계획을 세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라.
3)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을 읽는 것에 두 가지를 추가하면 된다. 성경 구절에 질문을 하는 것과 그런 과정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4)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아주 귀한 방법이다. 예수님도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성경을 외울 때 우리는 유혹을 이기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며, 스트레스를 줄이고, 다른 사람과 믿음에 대해 나눌 수 있다. 근육과 두뇌는 모두 사용할수록 강해지고 발달된다.
5)묵상하는 것이다. 묵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걱정하는 방법을 안다면 묵상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3.하나님의 원칙들을 적용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모두는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들이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실천하지만 않으면 사탄은 우리가 성경공부 모임에 가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적용은 때로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드러내고 변화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실천하도록 격려해주는 소그룹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소그룹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것이다.
Bile is not for information but for transformation. -D.L. Moody-
성경은 알라고 주신 책이 아니라 살라고 주신 책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5. 어려움으로 인한 변화
< 롬 8:28~29, 찬송 342 >
모든 문제 뒤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려고 상황을 이용하신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반드시 어떤 상황 속에 있기 때문에 상황은 성경보다 더 유용한 도구이다.
어느 누구도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가까이 오게 하려고 문제들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절망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향한다.
하나님은 요셉이 갇히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지 않게도 할 수 있었고 바울이 탄 배가 파선하지 않도록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들이 일어나게 하셨고 그 결과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다.
어떤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일들을 선하게 사용하신다. 우리에게는 뜻밖의 일들이 하나님께는 우리를 위한 계획일 뿐이다. 이것을 로마서 8:28~29이 말해준다.
이 구절은 하나님은 일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어나게 하신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한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선한 통치자이시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약속은 전 인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만을 위한 것이다.
#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실수나 죄 그리고 상처까지도 포함한다. 악까지도 선하게 사용하신다.
# 합력하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소금, 계란, 설탕, 밀가루는 맛이 없으나 섞여서 맛있는 케�揚� 된다.
# 선을 이루느니라: 삶의 많은 것들은 악하고 나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에서 선을 만드는 것이 전공이시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다말, 라합, 룻, 밧세바 4 여인이 모두 그렇다.
#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으니: 우리의 삶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멋진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그래서 역사는 (History) 그의 이야기(His Story)이다.
#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당신의 아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같은 인격 갖추기
우리는 보석과 같아서 보석공의 끌과 망치로 깎여서 모양을 갖춘다. 모든 문제는 인격을 쌓을 기회이다.
<롬 5:3-4>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처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경험하신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자녀라면 고난의 경험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예수님처럼 문제 대처하기
1)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선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했다가 거절당한다면 이것을 기억하라.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Corrie Ten Boom 여사는 말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 절망한다. 나 자신을 본다면 낙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다면 안식할 수 있다.”
고난이 올 때는 바울처럼 고백하라.
<고후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2)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
“범사에 감사하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살전 5:18>는 말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지 “모든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4:4>고 하셨지 “고통에 대하여 기뻐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자기 학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3. 포기하지 말라.
인격이 자라는 과정은 길고 느린 과정이다. 우리에겐 인내가 필요하다.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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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시험을 통해 성장하기
< 약 1:12, 찬송 395 >
모든 시험들은 죄를 짓을 수 있는 동시에 선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탄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파괴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싶어 하신다. 우리가 죄를 짓는 대신 선을 행하기로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더욱 자라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성품(인격)과 관계없다.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두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신다. 또 슬픔 속에서 기쁨을 가르치시고 혼란과 당황 속에서 평안을 가르치신다. 심지어 압박과 분노 속에서 인내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시험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사탄이 하는 일은 뻔하다. 그는 태초부터 같은 수법과 낡은 속임수를 쓰고 있다. 시험은 4 단계이다. 아담과 하와를 시험할 때나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동일하다.
1단계, 욕구를 일으킨다.
그 욕구는 때로는 죄가 아니고 정당하거나 정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당한 욕구라도 잘못된 방법으로 충족시키라고 제안할 때 시험이 시작된다.
우리는 시험이 우리 주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시험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 내적인 욕구가 없다면 시험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2단계, 의심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정말 잘못되었나 의심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3단계는 거짓이다.
사탄은 진실을 말할 줄 모른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 사탄은 거짓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한다. 그게 그렇지 않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죄를 잉태하면 초기에는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지만 결국 드러나며 사망을 낳는다.
<약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4단계는 불순종이다.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것을 결국은 실천한다. 우리의 관심을 끈 그 무엇에 넘어간 것이다.
시험을 어떻게 이기는가?
시험을 이기려면 시험이 어떻게 오는지 미리 아는 것 외에도 다음 몇 가지 단계가 있다.
1. 두려워하지 말라.
많은 크리스찬들이 시험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며 두려워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라. 사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시험 자체는 피할 수 없다. 예수님도 시험 받으셨다.
<고전 10:13>.....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루터의 말처럼 새가 머리 위로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을 막을 수 있다.
2. 시험의 양상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비하라.
각 사람은 더욱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 있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이는 우리도 알고 사탄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요일, 어떤 시간, 어떤 장소, 누구와 함께 있을 때에, 무엇을 할 때에 더욱 시험받는지 자신을 파악하고 미리 시험에 직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엡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3.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천국에는 24시간 응급전화가 열려있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위급할 때 긴 기도가 필요치 않다. SOS! 메이데이! 도와주세요! 소리치면 된다. 이런 기도는 즉각 응답 받는다.
어떤 때는 계속 같은 시험에 빠지는 것이 부끄러워 기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주 부른다고 화를 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시험을 우리를 계속 하나님께 의지하게 만든다. 바람이 나무 뿌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시험을 이길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고 천국에서 상급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7. 시험을 이겨내기
< 고전 10:13, 찬송 395 >
빠져나갈 길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때로 이길 수 없을 만큼 시험이 강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이며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하는 유혹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물론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임무도 있다.
1.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라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에 맞서라”고 하지 않으신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유혹이 올 때 그 생각을 머리에서 없애려고 애쓰면 더 깊이 박힌다. 누군가 하품을 하면 따라한 적이 있는가? TV에서 광고를 보다가 배고프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그것이 생각의 힘이다. 절대로 엄마를 닮지 않으려고 하다가 엄마처럼 되는 수도 있다.
시험의 1단계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과 싸우지 말고 상황을 피하라. 그 사람을 만나지 말고, TV를 끄고, 영화 중간에 나오라. 쏘이지 않으려면 벌통에서 멀어지라.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가장 좋은 피난처는 성경이다. 성경은 말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 <고후 10:5>
2. 좋은 크리스천 친구나 도와주는 그룹을 두라.
적어도 한 사람은 우리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다른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음을 열고 고백할 때 꿈쩍하지 않던 죄가 떠나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사탄은 우리의 죄와 시험이 독특한 것이므로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고 속이지만 우리의 상처를 정말로 치유받기 원하면 숨기지 말고 내어 놓아야 한다.
어떤 문제들은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 크고 깊다. 우리에게는 조건없이 사랑하고 믿어줄 소그룹이나 친구가 필요하고 당신도 그들에게 똑같이 베풀 수가 있다.
3. 악에 대항하라.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후 마귀를 대항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마귀에게 대항할 수 있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마귀는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 단지 제안할 뿐이다.
둘째 단계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사탄과 논쟁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암송하지 않으면 우리는 총알 없는 총일 뿐이다.
4. 약점을 깨달으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것은 재앙을 부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이 말은 우리가 속이는 것에 증숙하다는 의미이다. 상황만 주어지면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시험당하기 쉬운 상황에 처하지 말라. 상황을 피하라. 자신감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8. 시간이 필요하다
< 빌 1:6, 찬송가 341 >
성숙을 위한 지름길은 없다.
사람이 자라서 성인이 되는데도 몇 십년이 걸리고 과일이 익는데도 한 계절이 걸린다. 덜 익은 토마토를 따서 이산화탄소를 뿌려 빨간색으로 만들면 먹을 수는 있지만 제 맛이 나지 않는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의 개발도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자랄 것을 고민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얼마나 강하게 자라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신다.
제자도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평생 계속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속도에 집착한다. 우리는 지름길로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도와 안정성에 관심을 두신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가?
하나님은 빨리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씩 변화시키는 방법을 택하셨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우리는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는지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반복 학습이 필요하다.
2. 우리에게는 잊어야 할 것이 많다.
몇 년 동안 생긴 상처와 병을 한 순간에 고칠 약은 없다.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3. 성장하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변화 없는 성장은 없다. 두려움이나 상실 없는 변화는 없다. 고통 없는 상실은 없다.
자신의 결점을 버리기를 두려워하며(그런 결점이 없다면 나 답지 않아.) 그 결점을 자신의 정체성(Identity)으로 삼으려 안주한다면 성장은 없다.
4. 습관이 자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도 친절을 베풀 정도로 친절하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친절하지 않다. 정직이 습관이 되기 전까지는 정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계속 연습하여 결국 그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딤전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서두르지 말라.
1. 비록 느끼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라.
성장은 지루한 일이다. 점진적인 향상을 믿으라.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시간이 지나면 작은 싹이 큰 나무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물줄기가 바위를 깎아 조약돌을 만들어 놓는다.
버섯은 6시간 만에 다 자라지만 참나무는 60년간 자란다. 모세는 80년간 준비 시켰고 특히 40년(14,600일)간 광야에서 지내게 하셨다.
2. 배운 교훈에 대해 메모를 해 놓거나 일기를 써 두라.
사건을 적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깨달은 교훈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후대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잊어 버렸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히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3. 낙담하지 말라.
하박국이 하나님이 빨리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앞으로 갈 길을 보지 말고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보라. 에벤에셀에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고백함은 계속 인도 하시리라는 강한 고백이 된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29. 사명을 받아들이기
< 엡 2:10, 찬송 381 >
오늘부터는 새로운 주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는 주제로 일주일 동안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기여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 우리는 먹고 숨쉬고 자리나 차지하라고 지음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을 사역 혹은 섬김이라고 한다.
1. 우리는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지어진 목적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렘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2. 우리는 섬기기 위해 구원받았다.
우리는 섬김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이 아닌 감사와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보여주는 잣대가 된다. 우리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반문해 봐야 한다.
사역은 전문 “사역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모두는 섬기는 사역자인 것이다.
3. 우리는 섬기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에게 섬김은 시간이 남을 때 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섬기는 것과 주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셨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갈릴리 호수와 사해의 비유는 잘 알려진 교훈이다. 베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까지도 메말라 버릴 것이다.
섬김은 인간의 본능과는 정 반대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점차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누구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
영생을 준비하기
지상의 삶이 끝나는 날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롬 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하지 못한 것을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변명에 동의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섬기지 않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면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섬김과 의미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무엇인가를 위해 내어 놓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직장? 스포츠? 취미? 명성? 부?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섬김만이 진정한 의미를 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이다.
우리는 무슨 핑계를 대면서 사역을 회피하는가? 아브라함은 노인이었다. 요셉을 팔려갔다. 모세는 말에 어눌했다. 기드온은 가난했다. 라합은 부도덕했다. 엘리야는 자살을 생각했다. 요나는 마지못해 하는 성격이었다. 나오미는 과부였다. 세례요한은 성격이 괴팍했다. 베드로는 즉흥적이었다. 삭개오는 따돌림 받았다. 도마는 의심이 많았다. 바울은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디모데는 마음이 약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사역에 쓰셨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핑계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30.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
< 사 43:21, 찬송 432 >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을 만드실 때 저마다 특별한 재능을 주셨다. 어떤 동물들은 잘 뛰고 어떤 동물들을 수영을 잘하고 혹은 땅을 잘 파고 혹은 날기도 한다. 이 진리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기 전에 건물의 용도를 먼저 묻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계획하셨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만드셨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하나님은 나 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사역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유전자 하나하나를 조합하셨다.
<시 139: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으심 뿐 아니라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라도 의미없는 일은 없다.
하나님은 절대로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분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의 능력, 관심, 재능, 은사, 성격, 인생의 경험 등 이 모든 것을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종합체이다. 우리가 만들어진 모양(Shape)를 다음 다섯 가지로 살펴보자.
S: Spiritual Gifts (영적인 은사들)
H: Heart (마음)
A: Abilites( 능력)
P: Personality(성격)
E: Experience(경험)
모양1: 영적인 은사들을 사용하기
하나님은 사역(섬김)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영적인 은사를 주셨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시고 우리 각자가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가 각각 다르다.
이렇게 우리 각자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셨다. 교회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은사들을 사용할 때 모두에게 유익하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은사를 섬김에 사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으면 내가 불이익을 당한다.
이같은 기본적인 진리를 망각할 때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나와 같은 일을 하기를 요구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모양2: 마음의 소리를 듣기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희망, 관심, 포부, 꿈, 사랑하는 것을 대표한다. 그래서 “내 마음을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대표한다. 마음은 우리의 말, 느낌, 행동을 결정한다. 마음은 열정이다. 우리는 어떤 것에는 열정을 느끼지만 어떤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러한 관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신다. 즉 의무감이 아닌 열정적으로 섬기라는 뜻이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신호는 첫째는 열심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동기부여가 필요없고 누가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급여를 받지 않아도 무방하다. 마음없는 일을 하면 쉬 낙심된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두 번째 특징은 효율성이다. 어떤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인생에서 ‘의미’가 ‘물질’보다 중요하다.
<잠 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것이 솔로몬의 고백이다.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마음을 주셨는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31. 내 모습을 이해하기
< 시 139:13-14, 찬송 492 >
오직 나 자신만이 내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시되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없게 하셨다. 즉 세상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해 놓으신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어제 우리는 각자는 고유한 모양새(Shape)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S: Spiritual Gifts (영적인 은사들)
H: Heart (마음)
A: Abilites( 능력)
P: Personality(성격)
E: Experience(경험)
모양새3: 능력을 사용하기
능력이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천부적 재능이다.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운동신경이 발달하였고 수학이나 음악이나 기계를 잘 다루는 재능이 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심지어 죄를 짓는 능력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오용한 결과이다.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에게는 그럴만한 재능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소리이다. 연구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인식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500~700 개의 다른 기술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놀랄만한 능력 덩어리이며 하나님의 기묘한 창조물이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질 수 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된 다양한 기술들이 열거되어 있다. 건축, 행정, 빵굽기, 배만들기, 농사짓기, 나염하기, 조각하기, 수놓기, 기계다루기, 장사하기, 군인, 글 쓰기.... 다 열거할 수가 없는 많은 재능들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식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며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을 나누고 최소한 수입의 십일조를 예배의 행위로 드림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음계를 구별하는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헌신하라고 주신 것이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모양새4: 성격을 사용하기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는 분이시다. DNA의 분자들은 무한정의 방법으로 조합될 수 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개성과 성격이 독특한 사람들을 만드셨다. 주도형의 바울, 사교형의 베드로, 신중형의 예레미야, 안정형의 아브라함, 하나님은 이런 다양한 기질의 사람들을 쓰신다.
사역에 있어서 좋고 나쁜 성격이란 없다. 목공들은 나무 결을 거스리지 않고 결을 따라 작업하는 방법을 안다. 우리는 각자의 성격을 따라서 섬김에 적합한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기질을 발견하게 하는 [피플퍼즐 세미나]는 매우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모양새 5: 경험들을 사용하기
우리는 삶의 경험들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고 이 경험들 가운데 대부분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었던 것들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이런 경험들을 허락하셨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주로 다음 여섯 가지이다.
가족경험(자란 배경), 교육경험(어떤 과목을 좋아했는가?), 직업경험(무엇을 잘했는가?), 영적경험(하나님과 보낸 시간들), 사역경험(하나님을 섬긴 경험), 고통경험(상처와 시험, 문제들).
하나님은 고통경험들도 많이 사용하신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문제와 아픔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동일한 아픔을 경험한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심으로 우리를 쓰시기를 원한다면 이런 모든 것을 감추지 말고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잘못과 실패, 절망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지금의 나의 모습(SHAPE)으로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모습을 사용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32. 하나님이 주신 모습으로 섬기기
< 롬 12:5, 찬송 493 >
하나님은 주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주님께 받은 것을 최대한 활용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습(Shape)이 아닌 방법으로 섬기려고 한다면 네모난 구멍에 둥근 물건을 밀어 넣는 것과 같다.
1. 현재의 모습을 발견하라.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a.은사와 능력을 평가하라.
시간을 내어서 자신이 잘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별해보라.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한 의견을 물어보라. 내 사역의 열매들을 평가해보라. 우리는 먼저 섬기는 일을 해보지 않고는 우리가 잘 하는 것을 알기란 어렵다. 종종 나이가 70대나 80대가 되어서 자기에게 감추어진 재능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해보라. 우리는 사역하면서 은사를 발견하는 것이다.
b.자신의 마음과 성격에 대해 주의 깊게 검토하라.
내가 사랑하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어떤 일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는가? 혼자 일하고 싶은 가, 함께 일하는 것이 좋은가? 협력을 좋아하는가? 경쟁을 좋아하는가?
c.자신의 경험을 점검하고 그것에서 배운 교훈을 끌어내라.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고 어떻게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영적인 일기를 쓰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고통과 실패의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고요한 깊은 시간을 가지면서 이 경험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지 묵상하라.
2. 자신의 현재 모습을 용납하고 즐기라.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내 모습을 감사해야 한다.
<롬 9:20-21>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말고 대신 현재의 모습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먼저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경계선 이상을 넘어가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각자의 경주를 기쁘게 경주해야 한다.
<갈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시하라. 바울이 위대한 사역자가 된 이유는 그러한 비난에 끌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자신의 모습을 계속 개발하라.
우리가 받은 것을 극대화시키라는 교훈을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근육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쇠퇴해버리듯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도 사용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지 그 은사는 연습을 통해 더 넓혀지고 개발될 수 있다.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연구와 조언과 실습을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적당히 개발된 은사로 만족하지 말라.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지금 우리가 개발한 그것으로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영원한 책임과 상급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33. 진실한 종의 행동지침
< 막 10:43, 찬송 360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나 우선“의 정신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종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인기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대함을 신분이 아닌 섬김의 잣대로 측정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대함을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얼마나 섬기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섬겼는가에 따라 결정하신다.
누가 더 귀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를 다투던 제자들처럼 오늘날도 교회 지도자들은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부르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종의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지를 보여준다. 종이 되는 데는 특별한 은사를 요하지 않는다. 종이 되는 데는 오직 성품만이 필요하다.
1. 진실한 종은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
종은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편할 때만 섬긴다면 우리는 종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하여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 종은 자신의 계획에 방해를 주는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신 사역으로 생각하고 섬길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2. 진실한 종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본다.
종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섬길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은 오래 가지 않고 빨리 사라져 버리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내일 오라. 내일 주겠노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잠 3:28)
3. 진실한 종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한다.
종은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명령받은 일을 즉시 행한다.
불완전한 섬김이 최선의 의도보다 낫다. 예수님은 ‘잘하지 않으려먼 하지도 말라’고 하지 않으신다. 누구든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든지 달려들어 동참하며 실수와 부족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4. 진실한 종은 모든 일에 대해 똑같이 헌신을 한다.
종은 무슨 일을 하듯이 마음을 다하여 한다. 하찮은 일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인생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꺼리던 하찮은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공이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종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 못하는 작은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바울은 파선된 우에 나뭇가지를 모아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 불을 피웠다.(행 28:3) 이처럼 기회들은 종종 조그마한 일로 위장되어 있다. 별로 위대하지 않은 일을 하면 하나님은 특별한 당신의 일을 맡기실 것이다.
5. 진실한 종은 그들의 사역에 충실하다.
진실한 종은 대충 끝내어 놓고 중간에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낙심해도 헌신한 바를 완수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헌신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매주 여러 기관에서 봉사자들이 불참하거나 준비를 제대로 해오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헌신을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테스트이다. 이 테스트에 합격한다면 우리는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다니엘, 바울, 디모데와 같은 무리이다.
6. 진실한 종은 낮은 자세를 유지한다.
종은 눈가림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지적받은 것이다.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요셉은 조용히 보디발은 섬겼고 간수를 섬겼다. 떡굽는 관원과 술맡은 관원을 섬겼다. 그리고 총리가 되었을 때도 온 나라를 섬겼고 결국 형들을 섬겼다.
이렇게 이름 없이 음지에서 섬긴 종들을 하나님은 천국에서 공개적으로 상 주실 것이다.
주제: 목적이 이끄는 삶
34. 종의 마음으로 생각하기
< 민 14:24, 찬송/ 507 >
종이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보다 왜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아마샤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대하 25:2)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 버렸다. 진실한 종은 다음의 다섯 가지 마음 가짐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1. 진실한 종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자신에 대해 적게 생각하는 것, 이것이 종의 마음이다.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나를 비운 적이 언제였는가? 섬김의 목적이 그들이 나를 좋아하고 우러러 보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종의 마음이 아니라 속임수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내 필요를 채우느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느냐의 싸움을 싸운다. 자신을 부인하는 이것이 종이 되기 위한 핵심 요소이다.
다른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아랫사람처럼 취급하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을 종의 삶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으라.
2. 진실한 종은 주인이 아닌 청지기같이 생각한다.
청지기는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이다. 요셉은 종의 신분으로서 보디발의 집안 일을 맡았고 감옥 안의 죄수들을 맡았고 마침내 온 애굽의 관리를 맡아서 충성하였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의 청지기 의식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은 돈 문제이다. 돈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대치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일일 때 돈이 우리를 섬기지만 돈이 우리 주인이 될 때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된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 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사역(섬김)을 위해 사는 것과 돈을 위해 사는 것은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목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돈을 가지고 우리를 시험하신다.
3. 신실한 종은 자신의 일에만 집중한다.
그들은 다른 종들의 사역과 비교, 비판,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한 팀으로서 각자 맡은 일이 다르다. 그러므로 경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각자가 맡은 일로 바쁘다보면 다른 사람을 비판할 여유가 없다. 주인의 다른 종을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롬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4. 진실한 종은 그리스도 안에 정체성을 둔다.
그들은 은혜로 용납받고 조건없는 사랑을 받았기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런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기꺼이 발씻기는 일을 한다. 그는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포장하거나 하지 않는다.
종은 대단한 직함이나 특별한 가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야고보는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직함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소개했다.(약 1:1)
5. 진실한 종은 사역을 의무가 아닌 기회로 생각한다.
진실한 종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이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기쁘게 섬긴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섬김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상 주신다는 약속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중 10%의 크리스챤만이라도 종의 삶을 산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요 12: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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