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에 살았던 구약 에스더와 모르드개
이란에서 고대 도시로 손꼽히고 있는 하메단엔 구약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유적들이 무척 많다. 바사제국의 왕들이 살았던 여름궁전이 최근에 발굴되어 그 유적 터에서 발견된 왕궁 터의 기초석인 주춧돌과 각종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외도 바세제국 다섯 번째 왕인 아하수에로왕(Xerxes))의 비문이 있는 간자너메, 구약 에스더서의 주인공 에스더의 무덤이 있어 성경 고고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필자가 이곳에 살면서 하메단에 있는 에스더서의 무덤을 중심으로 그 역사성을 짚어보려고 한다.
당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B.C.5세기 후반부에 페르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간의 갈등과 반목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페르시아에 대해 기록한 시기는 에스더 7-9장에 해당되는 기간이었다.
그는 에스더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아하수에로 왕을 변덕이 심하고 관능적이며, 때로는 잔인하고 독재적이라고 묘사하였다. 이 내용이 에스더 1장에 나오는 와스디 왕후를 폐위하고 곧이어 에스더를 새 왕비를 맞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란 남서부 고대 유적지 쉬라즈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서 발견된 아하수에로의 비문에는 ‘나는 아하수에로, 위대한 왕, 유일한 왕, 모든 종류의 방언을 쓰는 모든 나라의 왕, 땅 끝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겨울 궁전이었던 이란 남부 수쉬(Shush) 수산 성을 발굴하던 불란서 고고학자들은 아하수에로왕의 아버지 다리오 왕 1세가 제국의 곳곳에서 물자를 동원해 겨울 궁전을 지었다는 내용을 담은 토판을 발견하였다.
이 궁궐은 다리오 왕의 뒤를 이은 아하수에로에 의해 완성되었다. 아하수에로 통치 초에 수산 궁내에 ‘마르두카’란 사람이 최고 관리였다는 기록이 바벨론 근처 보르시파(Borsippa)에서 발굴된 상형 문자판에 적혀 있었다. 이 마르두카는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많은 유대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을 이은 여섯 번째 아닥사스다 1세와 다리오 2세의 통치 기간에 페르시아제국 내에서 주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관리였다는 것이 허구적인 상상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실제 인물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어떤 성경학자는 에스더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로 유대 여자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다는 것은 페르시아 법에 용납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성경에는 아하수에로 왕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당시 현지 이름은 크세르크스(Xerxes)이다. 그의 비문에 모두 크세르크스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한 고레스 왕이 죽고 캄비세스(주전 530-522년)와 다리오 1세(주전522-486년)가 왕위에 올랐다. 아하수에로는 다리오 1세의 아들로서 장남이 아니었지만, 다리오 1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주전 484-424년)는 아하수에로 왕이 고대 근동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린 야망 있고 뛰어난 전사이며, 또한 무자비한 통치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 기자는 실제 사건들의 연대기인 궁중 일기(에2:23)와 메대와 바사 열왕의 일기(에10;2-3)를 언급함으로써 에스더서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더서를 역사 소설, 또는 역사화된 지혜 이야기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르드개는 바벨론의 제2차 유다 침공 때(주전 597년경) 유다 왕 여고냐와 함께 포로로 잡혀 바벨론 땅에 끌려온 기스의 증손이고 시므이의 손자이며 야일의 아들이다. 그는 바벨론 땅에서 태어나 바사국의 도성인 수산(Susan)에 살고 있었는데 삼촌의 고아 된 딸 에스더를 친딸처럼 양육하고 있었다.
모르드개가 활동하던 시대 배경을 성경의 흐름 안에서 살펴보면 에스라서 6장과 7장사이에 나와 있다. 즉,유다 총독 스룹바벨에 의한 제 1차 포로 귀환(주전 537년경)과 학사 에스라에 의한 제2차 포로귀환(주전 458년경) 사이이다. 이때는 일반 역사책에서 ‘크세르세스’(Xerxes)로 알려진 바사 왕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던 시대였다.
바사 왕 아하수에로의 통치 시절에 아각 사람 하만은 바사 제국의 총리대신으로 왕 다음인 제2인자 위치에 있었다. ‘아각 사람’은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말렉족속은 오래 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후미에서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힌 족속으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공적이었다.
역사의식이 깊었던 유대인 모르드개는 유대 민족의 자긍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하만이 알게 되자 하만은 적개심에 불타올라 모르드개 뿐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기로 작정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왕비 에스더와 협력하여 하만의 계략을 물리치고 동족 유대인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세운 높은 장대에 자신이 매달려 죽고 말았고 그 대신에 모르드개가 총리대신이 되어 유대 민족의 큰 영광과 자랑이 되었다.
당시 바사국의 총리대신인 하만의 막강한 권세를 감안할 때 일개 포로의 후손에 불과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감히 대적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의 용기로 하만 앞에 끝내 무릎 꿇지 않았고 도리어 대적 하만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유대인이 13세기 경에 만들어진 에스더 모르드개 묘로 안내를 해주었다. 입구에 400kg에 가까운 대리석 문을 열고는 하나하나 설명을 해준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 구절과 십계명이 벽에 선명하다. 그리고 바로 옆에 여나므 명 앉을 수 있는 회당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한 묘라고 볼 수 없지만 이곳이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했던 지역으로 그 의미를 따져보면 충분하게 가능이 있는 지역임에 틀림없다. 2개의 관 위에 에스더 모르드개 이름이 새겨진 관을 보면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역사는 변함없이 이어져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에스더 모르드개 묘를 관리하는 유대인과 함께
간자너메 구약 아하수에로 왕 비문
묘실안에 있는 히브리어 십계명
에스더 모르드개 묘를 배경으로
밖에서 바라본 무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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