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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진리를 소개합니다

[스크랩] 고난주간 새벽 설교 자료(마태복음 21:1-11 외)

by 서귀포강변교회 2012. 4. 1.

 종려주일 새벽            *찬 송 : 416장

*성 경 : ① 마태복음 21:1-11  ② 마가복음 11:1-11  ③ 누가복음 19:28-40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3세를 사셨는데 이제 마지막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으러 가시는 날이다. 오늘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취임식을 하러 간 것도 아니고 상받으러 간 것도 아니고, 경사스런 일로 축하 받으러 간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두 종류가 있었어요. 예수께서 죽으러 간다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비난을 한다. 예수님 형제들은 비난을 했다. 또한 바리새인이나 거기 귀족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구 미쳤구나 뭐라 저 짓하고 있어' 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그것을 환영을 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신다. 당신을 따르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없지만 제가 가진 최선을 다해서 제가 가진 것은 말은 없습니다. 차는 없습니다. 마차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나귀 나귀래도 타고 가십시오.”

 

“새끼 딸린 나귀가 좀 불편스럽더라도 새끼가 줄렁줄렁 따라 다녀서 불편스럽더라도 제 나귀를 타고 가십시오. 이 훌륭한 일을 하러 가시는데 저는 무슨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 못하는 노래지만 호산나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

 

“저는 카페트를 살 돈이 없습니다. 양탄자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가진 겉옷을 깔 테니 이 겉옷을 밟고 가십시오. 당신을 찬양할 수 있는 다는 악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길가에 흔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 테니 이것을 그저 환영으로 받아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종려주일을 지내면서 한번 생각해보자. 여러분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부러워하고 칭찬하는가? 하루에 치질을 30개씩 떼네고 3000만원을 버는 의사가 있다. 그것이 부럽고 우리 자식들도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잘생기고 잘나고 공부 잘하고 뭐 이런 애를 보러 가는 것이 귀한 일인가? 아니면 이제 가난하고 병들어서 자기 집에도 있을 수가 없고 이제 조금 있으면 숨도 잘 못 쉬고 먹지도 못하고 눈껍이 끼고 귀가 막히고 대소변도 받아 내야하는 그런 아이들을 돌보러 가는 것이 더 귀한 것인가?

여러분은 어디로 가길 원하는가? 우리의 자식이 어디로 가면 잘했다고 박수를 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교인이면서도 불의한 방법으로 도적질하고 강도질해서 부자가 되었어도  여러분은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나요? ‘아 대단하다. 그 사람 대단한 것 같아! 그 사람 축복 받았어’정말 그것이 대단한 것인가? 그것은 지옥이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지옥인 것이다.

 

그런 일을 박수 치면 안된다. 부러워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정말 대단한 것은 예수님 같은 분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대단하다 그 말이다. 우리도...

 

한번만 모른 체 하고 눈감으면 돈을 많이 벌수도 있고 더 편할 수도 있는데, 더 높아질 수도 있고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권세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그것을 버리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다. 우리가 진실로 마음속에서 박수치고 환영하고 부러워해야 할 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막11:15∼18절  /  (192, 139장)  / 고난주간(월요일)  /  예수님의 분노와 성전청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부패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부패한 종교는 인간의 정신을 부패시키고 관계를 파괴한다.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전체 나라전체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시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복음을 들고 누군가와 싸우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유대교와 지도자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유대교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 종교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율법을 가르쳤으며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열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유대교와 싸우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복음을 들고 유대교와 싸우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가 순진한 백성들에게 가혹한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마23: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월요일에 성전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들러 엎으셨다. 또한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들러 엎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15절)  한 평생 인자한 모습으로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던 주님의 모습이 분노로 불타고 계셨던 것이다. 그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17절)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신성한 집이거늘 너희는 이 거룩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 너희는 만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주며 바른 가르침을 주어야 할 자들이거늘, 오히려 백성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소망을 빼앗아 갔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가난한 서민의 주머니를 착취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버린 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성전에 들어가셔서 채찍을 휘두르셨으며 왜 상을 들어 엎으신 것일까? "매매하는 자들"은 소나 양 같은 제물을 판매하는 상인들이다. 이들은 제사장과 결탁하여 순례자들이 정성껏 가져온 제물을 까다롭게 판정하여 불합격판정을 내리고 자기들의 가축을 사도록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 가난한 성도들은 한숨을 지어야 했고, 저들은 폭리를 취하여 제사장과 나눠가졌다.

 

"돈 바꾸는 자들" 역시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남자들은 누구나 내도록 되어 있는 성전세를 거둘 때, 반드시 은화 반세겔로 내도록 했다.  왜냐하면 로마화폐에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므로 우상으로 취급하여 유대화폐로 환전하여 내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환전상들은 많은 차액을 남겨 폭리를 취했고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결국, 가난한 백성들은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겨야만 했다.

 

도무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힘겹기만 했다. 이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이 분노의 사건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교회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주님의 거룩한 성령이 머무르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염되고 부패한 심령을 깨끗이 가꾸어야 하겠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깨끗하고 정결한 심령들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요 12:20∼32절       (319, 136장)     고난주간(화요일)   한 알의 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화요일이 되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운명의 날이 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시점에서 주님은 한 알의 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다.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한 알의 밀은 곧 예수님가리킨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첫째, 결별의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

 밀알이 가지에 붙어 있는 한, 밀알은 죽을 수도,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가지와 결별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한창 할 일도 많은 33살의 젊은 나이에 죽으셔야만 했다. 세상과 이별해야만 했고, 제자들과 이별해야만 했으며, 부모 형제들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중표 목사의 별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이런 가운데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이별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과감하게 이별을 고하신다. 왜?, 인류의 죄악을 담당키 위해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의 애착까지도 버리신 분이셨다.

 

둘째, 떨어지는 아픔이 있어야만 한다.

 땅에 떨어지는 아픔이 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아픔을 맛보셨다. 침뱉음을 당하셨고 뺨을 맞으셨으며 창과 못에 찔리셨다. 자존심도 땅에 떨어졌고, 주님의 피도 땅에 떨어졌다. 흘리신 눈물도 땅에 떨어졌고 채찍에 맞아 살점도 떨어졌다. 그 아픔이 얼마나 크셨던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셨다.

 

셋째,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죽어야만 한다.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나라의 시작이다. 죽어야만 천국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자. 주님께서는 양의 제물 대신에 죽으셨다. 죽지 않으면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나(우리) 대신 죽음을 택하셨다.

 

 제 2차 대전 당시, 어느 군인이 부상을 입고 한 쪽 팔을 잃게 되었다. 야전 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팔을 잘라내는 수술을 마치고 회복되어 눈을 뜬 그에게 의사가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곧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좀 안된 것은 당신이 한 쪽 팔을 잃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병사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팔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내 조국에 팔을 바친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도 밀알이 되어봅시다. 희생을 받아들이고 아픔과 고난을 감수하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찬양을 하십시다. '주님! 나의 눈물과 희생은 손해를 본 것이 아니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진 것입니다.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주님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이 고백이 주님께 드려지는 고난주간의 새벽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수)      마가복음 14장 1-11(17)절     고난주간 넷 째날(4) 84장, 87장

사랑과 배신의 날

고난 주간 넷째 날 수요일은 사랑과 배신의 날이다. 옥합을 깨뜨린 한 여인의 사랑을 받았다.

(3~9절).  누구의 배신이 있었는가?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다(10~11).

오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종려주일에 화려하게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주님은 3일 동안 계속 예루살렘 성전에 계속 들어가셨다. 첫날에는 입성하시고 성전을 둘러보셨고, 둘째 날에는 성전에 들어가 성전청소를 하셨으며, 셋째 날에는 성전에 들어가 밀알의 교훈을 하신 후 사람들과 변론을 하셨다.

 

그런데 고난 주간 넷째 날만은 성전이 들어가지 않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계셨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실 때였다. 바로 그 순간에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어떻게 헌신해야 할까?

 

우리는 헌신할 때 계산을 초월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때 그녀에게는 인간적인 계산이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이 어떤 것보다 소중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성도는 자연히 계산을 초월하게 된다.

 

“하나님은 물질과 능력을 동시에 주시지 않는다.” 목회를 하다 보면 정말 그런 것을 느낀다. 물질이 풍족한 곳에는 이상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가난한 곳에는 오히려 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 같다. 빌립보4:13절의 고백이 바로 체험적인 간증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면 가난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돈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 물질과 계산을 초월하지 않으면 신앙은 자라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예수님에게 와서 향유만 부어도 충분할 텐데 굳이 옥합을 깨뜨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어떤 뜻이 있었을 것이다. 이 여자가 옥합을 깨뜨린 행위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최대의 헌신의 고백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런 고백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주님! 이 옥합은 당신만을 위해 쓰여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옥합처럼 제가 주님 앞에 온전히 깨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으로 돈에 연연하여 살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의 진실을 진실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시기와 질투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던 일부 사람들이 분노하며 말했다. (4절)“...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사람들은 여인의 진실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왜 그럴까? 그래야 주님 앞에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달래고 자신의 양심에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나아가 가난한 자를 끌어들인다. (5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들이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했을까?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양심의 위안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헌신할 때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 한다. 또한 헌신할 때 미루지 말아야 한다. 십자기에서 죽으신 주님을 위해 헌신하려면, 계산을 초월하고, 전부를 드리되 미루지 않기를 바란다.

 

 

(목) 고난주간 다섯 째 날.  최후의 만찬.  막14:12~25(요13장 1-11절)

 

오늘은 고난 주간 다섯 째날이다. 이 날에는 세족식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성찬식이 있었으며, 성찬식이 끝난 다음에는 다락방 강화가 있었다(요14-16장).

다락방 강화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다락방에서 하신 최후의 유언 설교를 말한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 예수님의 위대한 중보기도가 있었고(요 17장), 그 다음에 기드론 시내 저편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신다(막14:26~72). 목요일에 벌어진 일들이다.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세족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시작은 참으로 중요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면 끝까지 어렵다. 그것을 고치려면 많은 시간과 물질이 낭비된다. 그래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끝이 잘못되면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고칠 수도 없다. 신앙생활도 시작도 잘해야 하지만 마무리는 더 잘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마무리 세대에 살아가고 있다.

 

처음을 잘 하는 것은 성공에 꼭 필요한 조건이지만, 마지막을 잘 하는 것은 행복에 꼭 필요한 조건이다. 마무리를 잘 준비한 사람은 마지막이 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장로가 되니 더 힘들다고 한다. 집사 때는 행복했는데, 왜 장로가 되니 행복하지 못할까? 책임감 때문일까? 아니다. 책임감은 오히려 외면한다. 그러면 왜 그럴까? 마무리 준비가 덜되어서 그렇다.

 

야구에서 선발투수가 지치면 마무리 투수로 교체한다. 그런데 마무리 투수가 충분한 준비가 안되어서 나오면 오히려 더 많은 안타, 홈런을 맞고 더 많은 점수를 잃고 만다. 그래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준비가 덜 되어서 나왔기 때문이다. 끝이 좋아야 한다.

 

 둘째, 사랑할 때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가룟 유다처럼 주님의 품을 떠나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안에 있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끝까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쉽게 실망하고 포기하고 돌아선다.

옛날 처음 연애하던 시절의 사랑의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 처음 좋을 때처럼 노력해야한다.

 

특별히 우리 사랑하는 주님에 대한 사랑의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노력도 포기하면 안 된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왜 내가 뭔데, 제까짓 것이 뭔데, 미워할 필요가 있는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면 주님이 그 사람을 외면하신다.

 

 셋째,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야 한다는 교훈이다. 제자가 선생님의 발을 씻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섬김은 세상적인 섬김과는 다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넷째, 서로서로 발을 씻겨야 한다는 교훈이다. 주님은 선생님으로서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이제는 줄다리기를 그만 하라.

최대한 양보하며 살자. 주님은 온유한 자, 주는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하셨다.

사자가 강하지만 많이 살아 남지 못한다. 반면에 다람쥐는 약해도 사방 천지에 살아남아 있다.

 

 온유한 자에게 많은 열매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잡아먹으려는 자가 되지 말고 대접하는 자가 되라. 나에게는 조금 인색하고 남에게는 조금 관대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것이다.

 

 

마 27:45∼50절      가상칠언      (143, 144장)      고난주간 새벽 금요일

 

 오늘은 고난주간의 금요일. 우리는 이 날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른다. 이 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요, 가장 뜻 깊은 날이기도 하다. 인간이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처형시킨 날이기에 가장 슬픈 날이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죽으신 날이기에 가장 뜻 깊은 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수많은 채찍을 맞아 살점이 떨어지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었고 뺨을 때렸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본문을 보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다.  소리를 질렀다기 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절규였을 것이다.

 

46절-"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다. 그 가운데 가장 처절하고 비통한 부르짖음이 바로 46절의 절규다. 예수님의 가상 칠언을 간략히 살펴보면,

 

1,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잔악무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두 명의 강도 중, 한 명이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감동의 장면이다.

3, "여자여, 보소서." 하고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마지막 떠나는 길에 자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는 내용이다.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자신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효성을 보여 주고 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절규하신 것이다.

여러분! 이 절규는 인류의 죄악을 모두 짊어진 고통이요, 인류가 받아야 할 지옥 형벌의 모든 고통을 담고 있는 아픔의 소리다.  주님께서 이 고통을 당하시므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얻고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내가 목마르다." 이것 역시, 운동선수가 느끼는 갈증정도의 것이 아니다.

인류가 형벌을 받아 영원한 불의 심판을 받으므로 겪는 목마름의 고통을 주님께서 당하신 것이다. 그러한 목마른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 것이요, 천국의 백성이 된 것임을 깊이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 "다 이루었다."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신 주님의 승리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마지막 영혼이 떠나시기 전에 주님은 아버지의 손에 영혼을 의탁하셨다.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신 것이다. 구원을 얻는 것은 선행으로 받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뜨거운 감사와 눈물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이 감격을 영원히 간직하여 주님 나라에 가는 날까지 변치 않는 믿음으로 승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금.저녁)          마가복음 15장 33-39절   고난주간 여섯째 날

 

 고난 주간 첫째 날 주일은 "예루살렘 입성의 날", 둘째 날 월요일은 "성전 청소의 날",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 넷째 날 수요일은 "사랑과 배신의 날", 다섯째 날 목요일은 "최후의 만찬의 날", 그리고 고난 주간 여섯째 날 금요일은 "수난의 날"이라고 부른다.  오늘은 수난의 날에 주님이 수난은 당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특별히 세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자는 교훈.

만찬과 마지막 설교가 끝나고 한밤중에 예수님은 철야 기도하러 베드로와 요한, 야곱을 따로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이 동산에서 예수님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그것은 정말 죽어야 하는가 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얼마나 위대한 복종인가?

그리고 얼마나 위대한 결단인가? 우리에게도 이런 복종과 결단이 있기를 힘써야 한다.

 

  2. 어려움을 당해도 정신을 잃지 말자는 교훈.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이 결단이 있고 나서 세 제자에게 일어나 가자고 하며 동산 어귀에 있었던 나머지 8명의 제자도 불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눈물과 피로 얼룩진 것을 보고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대략 이때가 새벽 3-4시쯤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예수님은 순순히 잡히셨다. 그 이유는 성경을 이루려 하셨기 때문이다(막 14:49). 주님의 삶은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라는 일관된 목적 하에 움직인 삶이었다. 만약 이러한 주님의 일관된 삶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주님의 두 어깨에는 인류 전체의 생명이 달려 있었고, 주님은 그것을 인식하고 일관된 삶을 사셨다. 이러한 주님의 삶을 보면서 무엇을 도전받습니까?

 

그러한 주님의 모습 앞에서 조그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시험에 들면 죄송하지 않는가? 주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도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마 26:56; 막 14:50).

 

  3. 우리도 주님처럼 의의 십자가를 지자는 교훈. 

제자들이 다 떠난 고독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홀로 남아 정신없이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빌라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가에 돌아가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수많은 수치와 모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실만 생각해도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인가?

 

①주님은 채찍으로 맞으셨다. 이 채찍에 맞으면 등이 갈기갈기 찢겼다. 그 채찍은 우리의 병든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 대신 당하신 것이었다. ②병사들이 희롱을 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고, 갈대를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조롱하기 위해 꿇어 절했다(막 15:19). ③자신이 직접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다. 그때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졌다. ④보통 십자가 사형수에게 진정제로 쓰이는 몰약을 섞은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거절하신다(막15:23). 그리고 오후 3시에 예수님은 운명하셨다.    

         예수님은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도 함께 죽자. 죽어야 산다.

하나님이 일은 죽은 사람이 한다. 자기가 죽지 않고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척 하면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나를 죽여서 주님의 일을 하자.

출처 : 섬김...그 아름다운 향기로...
글쓴이 : 은혜의 강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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