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의 정의: 영어에서 긍휼이란 “Compassion = com + passion”으로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지각의 차원에서 공감하는 것을 넘어 그에 따르는 행동을 취한다는 실천적인 공감까지 포함한다.
북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렘31:20)” 하신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하나님의 심경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의 성경적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창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라헴”(רַחַם)은 “긍휼” 혹은 “자비”를 의미한다.
즉 “긍휼”이란 상대방에 대한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듯한 사랑과 공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심각한 고통인 죄로 말미암는 죽음을 동일하게 느끼시고 대신 당하신 긍휼의 결정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긍휼의 지식만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긍휼의 실천까지 보여 주셨다는 점이다.
예수님 당시의 긍휼: 로마의 힘과 무력과 용맹을 숭앙하고 아첨하는 당시 철학자들 대부분은 긍휼이나 자비를 영혼의 질병이요 경멸의 대상으로 여겼다. 더 강인하고 무자비한 자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역설을 쏟으신 것이다. 주님은 산에 모인 무리들을 향해 시대 정신에의 역류를 주문하신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그런 삶의 원인을 제공한 원수에게 응당한 보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의 마음을 지키라는 역설적인 권고였다.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길러서 찬탈당한 조국의 주권을 복원하고 자유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민족적인 기운을 쏟아야 할 중차대한 시국에 어쩌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주문이진 않았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인간적인 문맥이 고려된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에 근거하여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고 하나님은 누구시고 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정체성과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신 것이었다.
긍휼의 복은 그냥 따뜻한 마음을 품으라는 인간적인 성정의 연마를 주문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단순히 시간 속에서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면모가 이러해야 한다고 교훈하신 것만도 아니었다.
긍휼의 그릇: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긍휼의 그릇”이라 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인한다.
1)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우리의 우리의 속성이 ‘긍휼’이다. 2) 동시에 긍휼히 여긴다는 것에는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자비로운 선택과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우리가 타인을, 특별히 원수까지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부르심이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의지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나의 판단도 아니고 상대방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긍휼에만 근거한 것이기에 그렇다.
긍휼과 경외: 시편 103편13절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도 노래한 것처럼, “주의 긍휼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른다(눅1:50)”고 하였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경외와 긍휼의 연관성을 확인한다.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다르지가 않기에 어쩌면 마땅한 것인지도 모른다.
잠언의 지혜를 주목하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의 창조자를 멸시하는 자(잠17:3)”라고 말한다.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자세는 단순히 그 당사자와 결부된 문제만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면에서는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긍휼은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유익을 제공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에게 그 자체로 축복이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요,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는 그런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긍휼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잠언 11장 8절을 보면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타인에게 사랑과 긍휼을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이겠다. 인자하지 않는 것은 그런 유익의 상실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는 말씀도 유념해야 한다. 긍휼이란, 타인을 긍휼히 여기면 유익이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해가 된다는 이중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타인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기도 하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는 자라는 이야기다. 성경적인 자기애는 이렇게 역설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긍휼의 당위성: 사실 타인에 대한 우리의 긍휼은 무조건적 당위성을 갖는다.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3)"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우리의 용서는 마땅하다.
긍휼의 유무에 따르는 해로움과 유익이란 결과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을 입은 우리 모두가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재론의 여지도 없이 마땅하다.
긍휼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긍휼의 방법1: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놀라운 일을 성취하게 된 동기는 그의 노예시장 경험이다. 그는 흑인들이 상품처럼 흥정해서 매매되는 것을 보았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들과 아들들이 각각 다른 집으로 팔려가 가정이 찢어지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대접을 받고 싶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흑인들도 자신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타인의 아픈 자리에 나의 전존재가 참여하는 공감이다. 느낌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기에 노예제도 폐지가 가능했다.
긍휼의 방법2: 로마서 12:8,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니라.” 혀를 차면서 있는 눈치 다 주면서 부담감 팍팍 느끼게 만들면서 마지못해 떠밀리듯 ‘동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긍휼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즐거움은 상대방과 어떠한 계약적인, 의무적인, 인과적인 관계성에 기초하지 않은 자발성을 의미한다.
즉 긍휼은 마음의 중심에 어떠한 반대나 거리낌도 없이 넘치는 적극적인 자발성의 발로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긍휼의 방법에서 우리는 긍휼이 단순한 모양 갖추기가 아님을 확인한다. 일시적인 생색도 아니며, 자신의 이미지를 치장하는 장신구도 아니다. 긍휼은 성품이요 됨됨이다.
탈무드의 긍휼: 유대인의 교훈집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옆집에 가서 칼을 빌려오라 했다. 아들은 빈 손으로 돌아왔다.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이번에는 그 집에서 반대로 칼을 빌리러 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칼을 내주라고 했다. 이 때 아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며칠 전 나는 빈손으로 왔는데요.’ 이 때 아버지가 말했다.
1) 저 집에서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복수다,
2) 저 집에서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 말하면서 빌려주면 이건 증오란다,
3) 거절 당했다는 것을 깨끗이 잊고 빈 마음으로 칼을 빌려주면 이것이 곧 긍휼이다.” 긍휼의 빈자리는 이처럼 복수와 증오가 차지한다.
긍휼의 부재는 무엇인가: 긍휼이 없다는 것을 모세는 이렇게 설명한다: 신명기 19: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니라.”
언뜻 공평하게 보이는 이런 차가운 “보복성 정의”는 긍휼과 무관하고 긍휼과 정반대다. 이러한 긍휼의 부재는 단순히 상대방이 긍휼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긍휼의 부재가 가져오는 결과: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기록한다: 야고보서 2: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그러나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히 여김이 주어지지 않는다.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긍휼히 여기면,
1) 타인에게 긍휼의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2) 만세 전부터 작정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자유롭고 주권적인 의지의 선택을 나타내고,
3)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며,
4) 긍휼히 여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속성에 연합하게 되며,
5)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며,
6) 결국 그 긍휼은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긍휼의 기회: 우리 주변에는 긍휼이 발휘될 계기들로 충만하다. 가까이는 아내나 남편을 비롯하여 자식들, 부모님들, 친구들, 친지들, 동료들, 이웃들이 모두 긍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긍휼의 향기가 가장 짙게 진동하게 될 대상은 원수이다. 상대방의 상태나 조건이나 관계성을 떠나서 우리가 모든 인간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긍휼이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 참으로 불쌍하다. 불쌍함은 인간의 실존이다. 아무리 잘나가고 근사하고 멋있어도 죽음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시야가 좁아서 한 사람의 종말이 아득한 미래처럼 잘 감지되지 않아 우리는 어떠한 인간이든 필히 맞이하게 될 종말을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분노와 즐거움과 흥분과 부러움이 늘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시야의 단편성 혹은 편협성 때문에 촉발된다. 이는 하나님이 배제된 반응이다.
긍휼의 필요성: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갈등은 끝난 듯하여도 곧장 흔적조차 사라지는 '칼로 물배기'와 같아서 일평생 지속된다.
부모와 자녀와의 신경전은 살얼음판 상태의 긴장이 단 하루의 휴전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주와 직원 사이에도,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도, 교수와 학생 사이에도,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도 저마다 속 터지는 사연들로 휴전선을 방불하는 반목과 대립의 차가운 기운이 쉬 제거되지 않는다.
누구나 경험하고 공감하는 인간사의 현실이 그러하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빚어지는 현실이다. 언젠가는 죽음이 갈라놓을 관계이다. 있을 때 최대한의 긍휼로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 배우기: 타인을 긍휼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제대로 배운다.
예레미야 애가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한다.”
긍휼의 달인이신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셨나? 예수님께 이 땅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죽음으로 한발짝씩 다가가는 가시밭 길이었다. 그런 주님께서 자신의 속성이 어떠함을 설명하고 제자들로 그런 속성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며 그러한 신적인 성품에의 참여가 그들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확신 속에서 교훈하신 말씀이 바로 팔복이다.
당연히 긍휼도 다른 복들처럼 죽음으로 한발짝씩 접근하는 행보이고 동시에 우리에겐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으로 다가가는 순례이며 땅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천상적인 지복의 엄습을 촉구하는 삶의 자세이다.
긍휼은 결코 기독인의 종교적 장신구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각자의 인격과 행실로 진동해야 할 향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에게 손해와 억울함을 유발하는 원수들에 대해서도 결코 내동댕이 쳐서는 안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이다. 그의 마음을 품는 게 다른 어떠한 희생보다 중하기에 긍휼을 접어서는 아니된다.
긍휼은 결코 타인의 악행이나 오류나 교만의 옳음을 승인하는 것도 아니고 사태와 상황과 상대의 강함에 비굴한 고개를 숙이는 나약함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승리의 깃발이다.
긍휼은 땅에서의 변동되는 모든 것을 잃더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로운 내음에 온 인격과 생이 휩싸여서 원수들도 그것에 취하게 만들고 그들의 뽀족한 창을 꺾고 살벌한 검을 녹이며 난폭한 전운의 불씨마저 꺼뜨리는 강력이다.
긍휼은 기독인의 가슴에서 한번도 그 박동을 멈추지 말아야 할 주님의 심장이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인간의 실존에 기반한 긍휼, 그런 인간을 향해 긍휼의 길을 목숨까지 희생하며 완주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첨경인 긍휼은 우리에게 취하라고 주님께서 건내시는 복이다.
그 복은 주변에 산적해 있다. 관심의 손만 뻗으면 취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비롯하여 부모님과 자녀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 원수들에 이르도록 긍휼의 복으로 충만하다. 타인을 긍휼히 여김으로 주님의 향기가 발산될 빼곡한 계기들이 가까운 일상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사실 긍휼은 꼭지가 틀어진 관계성 속에서 각별한 위력을 발휘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긍휼의 출처가 지금도 우리로 진멸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임을 확인한다.
상대방의 존재를 제거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진멸되지 않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 팩트를 기억하는 것이다.
원수를 대하는 마음: 잠언 24:17, 지혜자는 우리에게 원수라 할지라도 절망하고 자빠졌을 때에 고소해 하거나 통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처신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경은 원수들의 흥망성쇠 따위에 준동하는 것 자체를 금하신다. 그들이 망하면 즐겁고 그들이 흥하면 부러움에 빠지거나 배알이 꼬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다.
그리고 시간의 한 시점에서 비록 일시적 원수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돌이킬 하나님의 잠재적 백성인 줄은 우리가 알지 못해서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용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의 인과적인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1)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는 타인을 용서하는 것인가?
(마6:9-13, as)
2) 우리가 먼저 타인을 용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가?
(눅11:4, for)
3)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에 우리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는가? (요일4:19, able)
4)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우리의 용서는 마땅한가?
(마18:33,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네 가지가 논리적인 조화를 이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용서 자체는 과연 논리적인 것인가?
용서 혹은 긍휼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한다. 하나님의 용서 때문에 우리는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용서하되 하나님의 용서처럼 용서해야 하고, 그렇게 타인을 용서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후속적인 용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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