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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교육

장덕수 목사의 교사세미나

by 서귀포강변교회 2005. 6. 1.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3사람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 스승, 배우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교회교육에서 학습자들에게 이미 부모는 하나님이 정해주셨고. 배우자는 앞으로 본인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즉 교회학교 교사들인 것입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하는 것은 일생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교사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는가?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교사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 교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을 다루고자 합니다.


  교사는 자기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 라디오 상담프로그램에서 청취한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떤 한 남자가 어린시절을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고, 엄마를 괴롭히고, 가정을 뒷전으로 하면서 자녀에게도 함부로 대하고, 결국은 빚 때문에 집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어디론가 집을 나가버리면서 매우 불우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때 소년은 결심했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면 절대로 우리 아버지같이 살지는 않을 거야!’ 그 후 이 소년은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신도 아버지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힘에 끌려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전화상담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소년은 왜 아버지의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 아동기에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자기정체성(identification)”을 올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년에게는 자신이 귀한 존재이며,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사입니까? 교사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교사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사로서 여러분을 누가 부르셨습니까? 이사야 6장  절 “     ”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이 교사로서 응답을 하신 것뿐이지요. 교사로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와서 앉아 계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누가 세우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필요한 지혜와 능력으로 여러분을 튼튼하게 세우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세상속으로 누가 보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즉 여러분의 교사로서의 부르심. 세우심, 보내심의 권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그 누가 물러나라 하겠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사의 자기정체성이 부족한 교사들을 보면 자신이 교사의 직분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바라보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교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온전히 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어느 교회에 담임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이제 곧 대 심방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순서로서 심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집의 안 주인인 여 집사님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식사대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지? 사모님께 여쭈어봅니다. 하지만 사모님은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우리 목사님은 아무거나 다 잘 드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여 집사님은 이 말이 더 부담스럽습니다. 어찌되었건, 담임목사님은 심방을 오셨습니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려 놓았습니다. 같이 오신 다른 여 집사님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많은 여 집사님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목사님의 젓가락입니다. 예를 들어서, 김치에 몇 번, 소고기에 몇 번, 된장국에 몇 번..... 통계가 되어집니다. 이처럼, 몇 가정을 거치고 나니, 통계가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목사님의 식성을 파악하고서 음식이 준비가 되더라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여러분! 서두에 제가 왜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일까요? 이처럼 정성스럽게 담임목사님을 맞이하려는 여 집사님들의 마음이 예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분들이 왜 이렇게 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사님은 바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목사님이 대접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목사님의 젓가락에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젓가락에는 왜 관심이 많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도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명확히 아직도 모르고 계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교회건축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공원묘지 구입을 좋아하십니까? 성도들의 친목과 화합을 위한 모임을 좋아하십니까? 이러한 것도 다 필요한 것이겠지만,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사의 직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낳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지요. 이것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 이 장면을 잠깐 살펴볼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잠깐 휴식시간을 가지셨나 봅니다. 이 때 제자들도 피곤해서 잠깐 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 아이를 축복해주세요’ ‘기도해주세요’ 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이 장면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기가 막혔나 봅니다. 아니, 예수님이 지금 얼마나 피곤하신데, 그 잠깐 쉬는 시간을 쉬지도 못하시게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단 말이지? 또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수준 있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한다고 예수님께 데리고 온다는 말이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나요?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꾸짖는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14절에 “분히”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런 정도의 일로 분을 내신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의도는 충성스러운 마음에, 예수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쉬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반응은 “분”을 내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가로막는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의사표현이십니다. 여기에서의 “분”은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에 대한 “분”보다 더 강도가 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의 젓가락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의 젓가락에 온 정성을 다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젓가락에는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교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젓가락 -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는 - 을 바로 인식하는 사람이어야 되지 않을까요?


2. 학습자의 이해 - 어린이를 중심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매우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어떻게 보시기에 그렇게 사랑하신단 말입니까? 당연히 사랑하지요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어린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삶에 관한 짧은 경험을 나누어 볼까요? 제가 전도사 시절에 교육목사님이 식사 중에 저에게 갑자기 식사를 더 하라고 하시면서 밥을 한 술 떠주시는 것입니다. 한 술의 밥을 받은 저는 갑자기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 순간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왜 기분이 나쁘지?”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밥을 한 숟가락만 주어서 그렇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또다시 “아니, 한 숟가락 주었다고 왜 기분이 나쁘지?”라고 다시 저 자신에게 반문하여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습지 않습니까? 어처구니없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당시 나이가 30이 넘었고, 결혼을 해서 자녀가 2명이고. 공부를 했어도 대학을 졸업한 지가 몇 년인데, 사회적 위치도 있는데, 왜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는 것이지? 라고 저 자신에게 다시 반문하였습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다시 말해서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 제가 장손이었습니다. 모든 어른들 -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 - 이 한결같이 밥을 더 먹으라고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 숟가락 주면 정 없다”라고 하면서 반드시 두 숟가락을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경험이 초등학교 1-2학년 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20년 후에 이러한 현상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 말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을 한 숟가락’ 주었을 때, 기분 나빴던 이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만’ 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유치합니까? 하지만, 현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어린이 시절에 각인된 기억이 일생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몬테소리는 어린이들을 연구하면서, 각 나이 때마다 필요한 발달단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the period of sensibility"(민감기)라는 것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발달단계가 있어서 일생에 그 때에 맞추어서 발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를 놓치면 발달에 장애가 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어린 시절에 적절하게 가르치는 것이 일생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아셨던지,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학습자로서 어린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이들은 흡수력이 매우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용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스폰지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는 스폰지와 같아서 가르쳐 주는 대로 거의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와 쇠 같아서 물을 흡수하지를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병의 입구보다 더 큰 사과를 병 속에 넣기 위한 방법도 어른이 되어서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어린 사과이었을 때 병의 입구에 넣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는 어릴수록 그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래의 표를 보시면, 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이

0-4

4-14

15-30

30이후

확 률

1%

85%

10%

4%

                                 < 표1 -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연령 >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스폰지 같은 어린이들에게 분별력은 약합니다. 그래서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빨아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챤 교사들이 어린이들에게 빨리 나아가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가슴에 다른 더러운 물이 물들기 전에 빨리 나아가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더욱이 물질문명이 매우 발달해서 대중매체를 타고 비기독교적인 사상이 빠른 속도로, 모든 어린이들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몇 년 전에 유행하던 “몬스터”는 진화론적인 문화적 산물입니다. 심지어 목사님 자녀들도 이것을 유치원, 학교에서 친구들에게서 배웁니다. 그래서 그것이 옳은 것처럼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1960,70년대에도 중. 고등학교에 폭력을 사용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과 다른 것은 극히 극소수에 불과한 학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폭력이 대중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학생이 아닌 평범한 많은 학생들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전국적인 현상으로 말이죠. 왜 그럴까요? 제가 표현하기를 ‘청소년들의 사상통일’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중매체를 통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폭력적인 영화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폭력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폭력적인 인물을 영웅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잠재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자신을 화나게 하면 폭력을 사용하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대신 정당화가 자리 잡고, 심지어는 영웅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이 대중문화에 물들기 전에 - 어린 시절에, 가능하면 더 어린 시절에 -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양과 질적인 면에서 말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긴 초와 짧은 초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어린이일까요? 긴 초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린이의 남은 생애가 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이의 또 다른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인생의 시간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도 월등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어린이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매우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교사들이 먼저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3. 교사의 모형

  교사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 사람일까요? 학습자를 어떻게 이끌어 주나요? 먼저, 학습자를 어떻게 보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학습자를 “백지”와 같은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백지와 같이 깨끗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는 아무런 그림도, 색깔도 없는 상태입니다.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앞으로는 얼마든지 크고, 화려한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가정이 설정됩니다. 너무나 가슴 벅찬 일입니다. 너무나 기대가 되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이루는 것은 누구의 역할에 달려 있을까요? 어린이? 교사? 어린이는 단지, 가능성만 소유했을 뿐이지, 백지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백지는 어떠한 화가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림이 정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매우 재능 있는 화가에 의해서 백지위에 원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화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델은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교수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이고, 교사는 모든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전달하고, 어린이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육과정의 모든 요소는 전적으로 교사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모형의 약점은 너무나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학습자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린이를 씨앗으로 가정해 봅시다. 이 씨앗은 지금은 작고,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장차 성장해서 열매를 맺을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찾아서, 개발하는 것이 교사의 일 이라는 것입니다. 즉 정원사는 나무가 자랄 때 다듬어 줄 뿐입니다. 정원사가 나무까지 자라도록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이미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델에서 교사는 먼저,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어린이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이에게 합당한 방법으로 개발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가-백지’의 모델에서는 1명의 교사가 다수의 어린이를 동일하게 가정하고, 동일한 교과내용과 교수방법으로 가르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원사-씨앗’ 모델에서는 각 학생들 각자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구분하고, 다양한 어린이들 각자 각자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사중심의 교육과정에서 학습자(어린이)중심의 교육과정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교육과정의 효율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예를 두 가지의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다중지능이론에 의한 방법입니다. 둘째는, 주 5일 근무제에 대한 대안에서 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지능은 타고난 것입니까? 개발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이 과거에 주어진 질문이라면, 오늘날에는 과연 인간의 지능은 한 가지인가? 미국의 심리학자 Howard Gardner는 인간의 지능은 다중이라는 것입니다. 즉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지능의 종류를 아래 표에 실었습니다.

지능의 종류

의  미

종류

언어지능

(linguistic intelligence)

소설가,시인,평론가,코메디언,희곡작가,뉴스해설가,연설가

말하기,대화 나누기,

토론하기,시/일기쓰기,글짓기

신문 만들기

논리-수학지능

(logical-mathematical intelligence)

과학자,회계사,경영자,은행가,법조인,컴퓨터 프로그래머, 수학자, 약사

숫자계산하기,분류하기,문제의 해법추정하기,체계적으로생각하기

공간지능

(spatial intelligence)

건축가, 그래픽 디자이너, 지도제작가,

조각가, 미술가, 제도가, 항해사,

바둑기사

학습내용을 그림,그래프,심상

(image)로 표현하기,학습자료

에 색칠하여 요소구분하기

음악지능

(musical intelligence)

연주가, 지휘가, 작곡가, 음악평론가

노래하기,

신체운동지능

(bodily-kinesthetic intelligence)

무용가, 무언극 배우, 운동선수,

외과의사, 발명가

학습내용을 연극/동작으로 표현하기,신체를 활용하여 학습 활동하기

대인관계지능

(interpersonal intelligence)

지도자(정치,종교), 대중적 사상가,

판매원, 상담자, 치료자

집단학습,협동학습

개인지각지능

(intrapersonal intelligence)

어느 분야든지 세밀하고 정확하게 자신

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

(내면의 성찰을 잘 하는 사람)

명상하기,수업내용을 자신에

게 의미부여하기, 수업에서

자신의 목표 설정하기

자연관찰지능

(naturalist intelligence)

수업자료나 내용에서 요소간 차이나 공

통점, 특징을 발견케 하는 교수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곤충,식물의 특징관찰, 발견하

기, 위인의 일생이나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것을 발견하는

<표2 - 다중지능의 이해와 실예>1)

  인간의 지능은 다양한 데, 국․영․수 중심의 한국의 학교교육은 언어, 논리 지능이 뛰어난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학습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위에서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논리력은 매우 부족했었던 사람을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이처럼, 학생들마다 가지고 있는 지능에 따라서 학생들의 선호도가 다릅니다. 이러한 Howard Gardner의 다중지능 이론은 학습자의 탁월한 지능은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지능은 계속적으로 개발시키고, 부족한 지능도 찾아서 보충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사들의 교수과정이 학생들의 각각의 지능(특성)에 맞도록 다양하게 연구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전문성이 더욱 부각되는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주 5일 근무제를 살펴볼까요? 왜 우리나라는 주 5일 근무제를 해야 하나요? 주5일근무제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먼저, 다른 나라와의 노동 시간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대 만

한국

노동시간

1,979시간

1,720시간

-

1,480시간

1,842시간

-

2,474시간

휴무일수

142일

137일

145일

140일

139일

130일

91-101일

< 표3 - 다른나라와의 노동시간 비교 >2)

  이러한 주5일 근무제의 취지는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5일 근무제는 교회의 성장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금요일 오후부터 주일까지 2박 3일을 레저를 위해 들 로 산 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고려할 것은 이러한 주5일 근무제는 빈부의 격차를 더욱 벌여놓습니다. 상대적 빈곤감을 더욱 느끼게 하는 부작용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52주/1년을 매주 야외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가정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5일 근무제는 교회학교에는 기회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5일 근무제를 대비한 교회학교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대안적 제도

설 명

재미 친화적

교회교육 개념

“교회학교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없어서 다른 데 안 가고 교회에

온다”는 상황을 연출해 내는 것. 여기에서 ‘재미’란 신앙의 본질적   인 것-종교적 회심, 영적감동-을 뜻한다.

수련회식

교육 프로그램

1박2일 개념의 수련회 같은 방식을 연중에 수차례 시행하는 것

학년통합

교사들의 교육활동을 위한 에너지의 경제적인 사용

집단담임제

여러 반을 모아서 여러 교사를 공동 담임교사로 배치하는 제도

인터넷 보상 교육

수련회에 참여하지 못한 학생들이 소외당하지 않도록

수련회에서 실시한 교육내용과 정보를 제공함.

<표4 - 주5일근무제에 대한 교육목회 >3)

  이처럼, 주5일 근무제는 더 많은 교사의 헌신과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교사가 주일예배에 지각을 하느냐, 안 하느냐? 공과를 준비했느냐? 못했느냐? 라는 원초적인 질문은 시대에 뒤떨어진 교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시대에 발맞추어, 어린이들의 다양한 가능성의 개발을 위하여 교사의 전문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한 때입니다.

 

4. 교사(부모)에 대한 비판적 성찰 -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교회학교 학습자들의 신앙은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까요? 담임목사님? 담당 목회자? 교사? 물론 그렇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분들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들보다 더 영향력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어찌되었건 부모에게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신명기 6장 7-9절>

                      

그 예를 이스라엘의 자녀교육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교육의 발생』4)이라는 책에 보면, 최초의 기독교교육이 어느 시대에 발생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답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이후, 광야생활에서 기독교교육이 처음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교육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공동체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종교적 행위를 했다. 이 때 자녀들도 함께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묻습니다. “엄마, 무교병은 무엇이예요?” “유월절은 무엇이예요?” 라고 물을 때, 부모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교육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들이 기독교교육을 하는 그 현장은 실천이 있는 곳 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교병을 만들고, 초막절에 초막 속에 들어가 살면서, 하나님께 공동체 제사를 드리면서 지식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즉, 실천 속에서 지식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교육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앎과 삶의 실천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에서 앎과 삶이 분리되어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라고 부모가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자녀가 보기에는 기도보다는 전화를 먼저 붙잡고, 사람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앎과 삶의 분리입니다. 2002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렸습니다. 이 때 시청 앞에는 몇십만명의 군중들이 모였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아빠, 사람들이 왜 모였어요?” “사람들이 누구를 응원하나요?”라고 물을 때 아버지는 어떠한 행동을 합니까? 당연히 월드컵 축구 이야기를 하고, 한국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대답이 바로 교육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는 아버지의 애국에 대한 실천의 자리에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교육이 되는 것 입니다. 이 가운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가 느끼는 애국심이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더불어 민족적 공동체-다른 시민들과 함께-속에서 실천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독교인 부모들은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예배생활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 한국교회는 고3이 되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일까요? 고3이 되면 신앙수련회도 가지 않는 것일까요? 어느 교회에서 고등부 청년교사가 땅바닥에 앉아서 큰소리로 “엉엉!”소리를 내며 웁니다. 상황을 살펴보니, 고3학생(자녀)은 신앙수련회를 다녀오고 싶은데, 다녀와서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데, 부모님이 가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누구냐? 장로, 권사님, 안수집사, 또는 전에 교사를 했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청년 교사는 고3학생의 부모가 교회학교 교사이었을 때, 그 부모로부터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교사에게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놓고는 자기 아들에게는 다른 모습을 대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청년교사에게는 그것이 큰 충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특수상황일까요? 여러분은 이러한 부모님을 만나보지는 못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서적 앎과 기독교적 삶이 분리된 신앙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의 부모와 교회학교 교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5. 한국교회를 살리는 교사의 자세

  동화에 “이상한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이 이야기는 어느 마을에 갑자기 신비한 피리를 부는 사나이가 나타남으로 어린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는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사나이가 피리를 불 때 어른들은 무엇을 했지? 도대체 한 사람만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어린이들을 모두 빼앗기지는 않았을 텐데…, ‘이 마을은 참 이상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마을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참 생각하다보니, 그 이상한 마을이 멀리 있는 줄 알았더니, 바로 가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한국교회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어린이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보고도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서서히 한 명씩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학원 때문에, 세상의 문화 때문에, 어린이들이 바쁘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이상한 피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1970년대에는 주일학교에 어린이들이 가득했지만,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왜 이렇게 어린이들이 교회에서 사라져 가는 것일까요? 인구의 감소, 세상의 문화 발전, 교사나 어린이 모두 바쁘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사의 열정입니다. 과거 1970년대의 교사들은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이러한 교사의 열정의 회복이 더 급선무가 아닐까요? 교사가 살아야 주일학교가 살아납니다. 교사의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결론.

여러분! 어린이들이 여러분을 만나서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될까요? 여러분을 만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할까요? 자녀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시간을 먹고 자랍니다. 산모가 건강한 음식을 많이 섭취해야 젖먹이 자녀가 튼튼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교사 여러분! 힘을 냅시다. 교사는 교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땅(土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