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 제주상황과 4.3항쟁
해방 후 50년간 역사학계는 다른 어떤 부문 못지 않게 파란 속에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현대사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매우 일천한 형편이다. 해방후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으로 일제하 역사학계의 전통이 고루 통합도지 못하고 문헌고증학이 역사학계를 주도하게 되었고, 그것의 현실 분절적 경향으로 근·현대사에 관한 연구는 거의 공백에 가까웠다.
1960년대 4.19 민주화 운동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제2세대'들이 진출하여 식민사관 비판을 본격화하고, 민족사관과 내재적 발전을 주창하였다. 1970년대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이에 대한 민중운동의 심화, 1980년 광주민중항쟁 등의 격동을 거치면서 민중적 민족주의와 민족통일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1980년대의 격동 속에서 현대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동한 것은 역사학계의 '제3세대'라 일컬어지는 소장학자들의 진출에 의해서였다. 이들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할 수 있지만, 현대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활성화시키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현대사 연구에서 제 1단계는 '번역과 편역'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의 붐 현상'속에서 현대사에 관한 외국의 선진적 연구성과들이 속속 편역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 『분단전후의 현대사』등이 있으며, 특히 브루스 커밍스(Bruce G. Cu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과 데이비드 꽁드(D.ㅉ. Conde)의 『현대 한국 비사(An Untold History of Modern Korea)』는 2∼3개 출판사가 중복 또는 연합 번역한 바 있어 다시 번역 열풍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방 이후 반세기간의 사상적 동향과 갈등은 현대사 연구에도 반영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 비판적 이론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한국현대사에 관한 다양한 입장이 제출되고 여러 가지 논쟁을 낳았다. 이러한 이론적 지향은 1990년대 이후 일정하게 해체되면서도, 뚜렷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1)
현대사의 기점이 되는 1945년 8월 15일은 해방된 후 한반도는 혼란을 겪는다.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상황과, 외세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혼란을 틈타고 신탁통치안이 논의되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와 제주도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온 적대감정과 미군에 대한 적대감정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제주 4.3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제주 4.3항쟁이 일어난지도 벌써 5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제주 4.3항쟁에 대한 자료와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 먼저 제주4.3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 이유는 민중학살에 앞장섰던 자들이 지금도 이 땅의 민중을 지배, 수탈 착취하는 자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제주도 민중항쟁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고, 드러나 있지 않는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의 제주도의 반란을 살펴봄으로써, 역사속에서의 제주도에 대한 특징을 알아보고, 해방전후 제주도의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제주4.3항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제주4.3항쟁의 길었던 진행과정과 그 안에서 일어났던 여순반란사건을 알아보고 결과를 통해 마지막으로 남았던 제주도의 의석이 채워지면서 남한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을 통하여 남한정부의 정당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한가지 더 붙여서는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로 보는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Ⅱ. 해방전후의 제주도
1.농민항쟁의 전통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했고, 주기적으로 반란이 있어 왔다. 이 섬은 고려말까지 중앙정부의 직접적 통제가 미치지 못했으며, '탐라'라는 독립국으로 본토와 느슨한 민족적 관계를 유지했다. 13세기, 고려가 몽고족에 침략 당했을 때 이 섬은 원제국 침입자에게 저항하는 최후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정복된 후, 제주도는 몽고군 행정부 아래에서 말을 기르는 목초지로 변화되었다. 한 세기 동안 원제국에 대한 산발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으며, 후에 고려왕조가 다시 지배하려할 때 이에 저항했다. 이씨 조선왕조의 전 기간에 걸쳐 이 섬은 나라의 정치와 떨어져 침체되고 고립된 섬으로 남아 있었다. 정부의 유일한 관심은 분리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관리들은 관례적으로 제주도 주민들에 의해 있을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해서,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제주도의 고대왕조를 주장하는 지방색에 젖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족을 데려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제주도는 멀리 고립되어있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 추방지로 이용되었다. 다른 섬사람들처럼 이 섬의 주민들은 육지 사람들에게 멸시 당했으며, 정부에 의해 크게 무시되었다.2)
이 섬의 고립과 정부에 의한 무시는 19세기 동안 여섯 번이나 발생했던 반란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반란들은 전통적인 농민반란의 유형과 맞아 떨어진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방관들이 섬 주민들이 폭발점에 이르도록 착취하고 세금을 매겼다. 주민들은 그들의 분노를 자아낸 관리를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소동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직접적인 불만의 해결을 향해 발전해 갔다. 제한된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반란은 금방 동력을 잃어갔다.
연속적인 반란이 1813년에 시작되었다. 관청을 공격하려는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고, 주모자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두 번째 반란은 1863년 주민들이 과중한 세금에 반대하여 일어섰을 때 있었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지방에서는 폐지된 시장세의 계속된 과세조치였다. 주민들은 예리한 죽창으로 무장하고 제주관내를 점령, 관청을 불사르고 하급관리들을 살해했다. 분노를 터뜨린 후 그들은 집에 돌아갔다. 섬이 육지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4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권력에 의한 질서가 회복되었다. 간단한 조사 후, 운 나쁜 관리들은 유배지로 추방되었을 것이다. 정부는 '충성스러운 섬 주민'의 불평을 풀어주기 위해 밀린 세금을 감면해주고, 새로운 면제조치를 발표했다. 이 면세조치로 제주도는 이후 40여 년 동안 조용했다.
이 고요함은 1989년대에 섬 외부로부터 충격이 가해짐으로서 깨어졌다. 1981년 작은 봉기가 일어났다가 곧 진압되었다. 이로부터 5년 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간섭 하에 시행된 갑오개혁의 급격한 근대화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심각한 반란이 이 섬에까지 밀어닥쳤다. 이 소요 속에 처음으로 반외세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8년 방성칠의 지휘하에 탐관오리와 새로운 과세에 반대하는 세 번째 봉기가 발생했다. 반란민들은 진압되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 관청을 불태우고 관리들을 괴롭혔다.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난 1년 후인 1901년 봄, 마지막이자 가장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원인은 새로운 세금제도의 확립과 카톨릭의 도입에 있었다. 제정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제국은 1863년 반란 이후 어쩔 수 없이 중지된 세수 일람표를 작성, 특별세를 징수하는 조세청을 개설했다. 섬으로 파견된 세리들은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현금세제가 부과되고, 면제된 기간의 세금을 거둬들이고, 농업과 어업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과세부담은 너무나 가혹해서, 약 50%의 목재와 연안어장, 소, 말, 닭 심지어는 물고기, 달걀가지 수탈되었다. 이것도 부족했던지, 지방 공유지와 정부재산이 추가 세입증대를 위해 경매되었다.3)
기독교 역시 이 섬에는 비교적 낯선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카톨릭교도들이 1860년대 대원군의 박해정책으로 이 섬에 추방되어 왔지만, 1898년 조선인 전도사가 와서야 비로소 최초의 예배회합이 열렸다. 이 섬의 카톨릭 신자의 수는, 1년 후 프랑스 선교사가 도착하면서 급속히 늘어나서 전체 섬 인구의 1%를 점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종교의 호소는 전혀 영적이지 않았다. '부유한 기독교인들'은 선교사에 관심이 끌렸으며, 섬으로 추방된 동학교도들은 정부에 반대하는 피난처로써 이에 결집했다. 이 섬에서 전통적 사회구조로부터 벗어나서 가장 근대화된 그룹으로서의 카톨릭 개종자들은 많은 토지거래로부터 이익을 얻으면서 재빨리 세리의 역할을 차지했다.4) 비록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이 섬의 경제적 착취와 기독교의 전파 사이에는 좋지 못한 연관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하여 섬 주민의 여론은 급속히 한 방향으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원주민 개종자, 프랑스 선교사 그리고 세리들은 많은 지방관리와 일본인 상인, 밀수업자 그리고 대부분의 섬주민과 대립되는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주민들은 지방 유교사회의 우두머리인 오태현과 大正시대 일본어업관계자의 노예로 지낸 적이 있던 이재수의 지도 아래 급속히 민병을 조직 갔다. 선교사와 세리들을 제거하여 자기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지방관리들과 일본인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어업회사 소유주인 일본인 고센류쥬크는 민병들에게 수 백정의 총을 제공했고 반란의 결정적 순간에 선교사와 개신교들을 살해하라고 선동했다. 카톨릭 교도들도 그들대로 부당하게 투옥된 신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지방 감옥을 파괴하는 등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직접적 행동을 취했다.
이렇듯 고조되던 긴장은, 4월 중순경 선교사들이 서울로 여행을 떠났을 때, 마침내 거대한 폭력사태로 폭발했다. 양측의 사소한 싸움이 급속히 확대되어 엄청난 충돌로 발전했다. 섬의 대다수 카톨릭교도들은 제주시 성곽 뒤로 대피한 뒤, 관청의 병기로를 장악하고 스스로 무장했다. 한달 만에 선교사들이 돌아왔을 때, 천명에 달하는 기독교도들이 굶주린 상태에서 시를 포위하고 있는 민병들과 대치하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5) 프랑스의 첫 반응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요새를 이 부근에 구축하는 것이었다. 오태현과 그의 추종자 12명이 체포되어 시내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이 모험적인 대응은 단지 섬 주민들을 분노케 할 뿐 이었다. 선교사를 비난하는 사발통문이 전 섬에 나돌았다. 수천 명의 분노한 주민들이 시의 성곽으로 돌격했으나 수비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시 점령 기도가 좌절되자, 섬 주민들은 시골에 남아있던 기독교도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지방관리들의 보고에 의하면 시 외곽지역에서의 두 주간에 걸쳐서 하루에 4∼50명의 기독교도들이 분노한 주민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본 상인들이 섬의 민병들에게 수 백정의 총을 제공한 것은 물론 이 시점이었다. 강력해진 민병들의 압력이 가중되자 선교사들은 뒤늦게 오태현을 풀어줌으로써 상황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의도와 반대로 나타났다. 오태현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흥분이 고조되면서 이틀 동안 500명이 넘게 학살되었다. 섬으로 쫓겨온 정치적 망명자들이 중개인으로 나서서, 결국에는 반란군 지도자와의 협상이 열렸다. 그러나 5월 중순에 선교사들을 태우고 떠났던 배를 타고 도망쳤던 조세관리들의 우두머리가 신임 지방관으로 부임해 오자, 협상이 거의 결렬되었다.
이러한 반란은 서양세력의 직·간접적 영향아래 전통적사회의 사회, 정치, 경제 구조를 급격히 개혁하려는 아시아의 제 정부들에 반대해 일어난 반란의 일부분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개혁정책들이 제주도에서처럼 주민들로 하여금 거칠고, 공격적인 경향을 촉발시킨 것이다. 섬주민들은 경제적 고립, 무거운 과세, 카톨릭선교사·신도등 제조건으로 봉기한 것이다. 이 반란의 결과로 전통적으로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대전 통등으로 기존의 분리주의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반란에 참가한 사람들은 어설픈 감정을 벗어나, 무장투쟁이 섬의 억압적 질서를 해결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비록 과거와는 달리 조건이 급속히 변했지만 1848년 반란에서도 나타났다. 신 축년 봉기의 혁명적 신화가 1948년 반란에서도 흐르고 있었다.6)
2. 해방전의 제주도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제주도민에게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군에 계속 밀리게 되자 제주도를 일본 본토사수를 위한 '대미결전의 최후 보루'로 설정했다. 이 고도의 작전계획에 따라 일제는 종전 직전까지 관동군을 비롯해 7만 가량의 일본군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제주도로 이동 배치했다. 더욱이 '결7호 작전'으로 명명된 저들의 작전계획과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했을 때의 일본군 가상배치도를 보면, 7만 대군을 거느린 제주도 주둔 일본군 사령부는 상륙 미군에 최후까지 저항하기 위해 유격전을 준비했던 사실까지 밝혀졌다.
총독부는 종전 직전 제주도 주민 5만 명을 남한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송과정의 잦은 미군기 공습으로 일단 중단하고, 미군이 섬에 상륙하게 되면 주민들을 산중으로 데리고 가서 군과 행동을 같이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 그것은 20여 만 명의 제주도민을 산중으로 끌고 가 최후 결전의 소모품으로 상용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주도는 어느 날 갑자기 강대국의 전쟁터로 변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제국주의의 전략기지로 변한 제주도의 주민들은 두 강대국의 결전이 붙게 되면 그야말로 죽음밖에 택할 것이 없는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2월 9일 일본 방위총사령관을 미군과의 본토 결전에 대비해 7개월 방면의 육·해군 결전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작전암호명은 '결1호작전'. 미군의 일본 본토 진출 가능 루트를 7개 지역으로 예상, 각 지역마다 대비작전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3월 12일 최고전쟁지도회의인 이른바 대본영 각 군 작전주임 참모회합에서는 미군의 상륙지점으로 제주도와 훗카이도가 유력하다고 판단, '결1호 작전'(훗카이도)과 '결7호작전'(제주도) 이 유력하다고 판단, 결1호작전과 '결 7호작전이 보다 강도 높게 다루어졌다.7)
일제시대에 제주도는 농업에 치중되어 있는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상공업 및 공무 자유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그 결과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세분화된 직업구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제주도는 원래 농업 및 어업이 주업이었던 만큼 공업은 아주 빈약한 것이어서 옹기, 기와 및 괭이 등의 온기구와 기타 철제공업 및 가정수공업에 불과한 삼베, 죽세공, 머리빚, 관물 등이 겨우 자급할 정도로 생산되고 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이르러 제주도는 축산물 및 수산물을 원료로 하는 통조림, 패구 등의 제조업과 제주도에서 수요가 늘어나고 있던 양말, 양조 등이 제조업이 일본인에 의해 근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에는 통조림에 대한 군의 수요가 증가하여 통조림 제조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제조업 분야의 고용의 한계는 도민의 생존방식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였고 또한 당시 수산자원의 고갈에 따른 어업의 침체 등의 영향으로 도민은 새로운 생존방식을 찾아 일본 등지로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8)
섬의 전통적인 수산업은 근대화가 되었으나, 거의 일본인이 지배하였다.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를 박탈당했다. 다른 사람들은 토지세를 갚기 위해 가산을 팔아야 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통조림 제조공장, 양조장, 방목, 도자기공장등 제 산업이 이 섬의 수많은 실업자를 흡수하기에는 부족했다. 1920년 초, 오오사카와 제주도사이에 여권 없이 여객선이 소통되자 많은 원주민들이 가난과 과잉인구, 참혹한 경제적 궁핍에서 탈피하기 위해 일본, 나중에는 만주로 많이 이주해 갔다. 1935년까지 5만 명의 섬 주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직물, 광산, 수산업에 낮은 임금으로 고용되어 노동을 하였다. 5년 후 제주도민의 3배 정도가 도일했다.9)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한 다음 자국 자본의 운동논리에 맞추어, 토지조사사업, 산미 증산계획, 그리고 병참기지화정책 등을 통하여 조선의 농업과 산업 및 제 자원을 수탈하였고,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와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통하여 조선 민중을 철저히 억압하였으며, 더 나아가 노예화 교육, 황민화운동 등은 통하여 조선민족 자체를 말살하려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악랄한 식민지지배는 결국 조선민족의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일제의 조선지배 시기는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민족의 줄기찬 투쟁과 여기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점철되어진다.
제주도에 대한 일제의 지배도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하여 제주도내의 역둔토 및 민간지 등을 약탈하였고, 누에고치, 면화 및 어장 등을 수탈하였으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제주도를 군사적으로 중요시하여, 섬 전체를 요새화 하면서 도민을 수탈하였다. 동시에 일제는 이러한 수탈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도제를 실시하고 행정권과 사법권을 독점한 도사를 파견하여 제주도 민중을 철저히 억압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도민은 살 길을 찾아서 일본 등지로 유랑하기도 했으나, 한편에서는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나가고 있었다.
일제 통치에 대한 제주도 민중들의 투쟁은 1908년의 의병투쟁, 1918년의 보천교사건 등을 통하여 줄기차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1919년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때를 같이하여 제주도에서도 3월 21일 반일 독립운동이 발생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이르러 제주도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었고, 그 결과 제주도의 민중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제주도에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된 후, 공산주의자에 의해 주도된 최초의 항일운동은 항만 노동자에 대한 일본일 감독의 폭행사건을 계기로 1929년에 발생한 '산지항만 노동자운동'이었다. 일제는 제주도를 강점한 후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필요에서 도로의 신설, 확장과 각 항만의 축조 개수공사를 적극 추진하였는데, 도사 마에다는 제주도에 부임하여 오자 제주도의 해상교통의 중추항인 산지항을 개수, 확장할 것을 결정하고, 60만원의 자금과 100여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그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동원된 노동자들 중의 일부는 독서회 등을 통하여 사회주의사상을 학습하고 있었던 관계로 반일 의식이 높았고, 이때 일본인 감독의 노동자에 대한 폭행이 발생하자 마침내 100여명의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 김두경 등의 지도하에 '구타 반대' '최저생활 보장' '임금 인상' '조합조직' '신간 단축' 등의 경제적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하여 수십일 간 투쟁한 결과, 그들의 요구를 관철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1930년대에 이르러 제주도민은 1931년 제주농업고등학교 학생의 '동맹휴학사건'을 시발로 하여, 중문 면의 '적색농민조합투쟁'과 세화리의 '해녀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계속 투쟁해 나갔다. 이후 일제는 이러한 사건들을 빌미로 제주도내의 반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의 반일투쟁 세력을 다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지하로 잠입 해야만 했다. 10)
3. 해방후 제주 상황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35년간의 식민지배가 끝날 무렵 얄따회담 결정에 따라 일본과의 전쟁에 참가한 소련은 만주를 공격하는 한편 조선의 雄基를 점령하고(1945.8.11) 羅津(8.12) 淸津(8.13)에 상륙하여 계속 남진했다. 일본의 관동군이 쉽게 무너지면서 소련군이 한반도로 남진한 데 반해 미국군은 아직 류우꾸우도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한반도에 진주하기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따라서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다 해도 막을 길이 없었다. 이에 초조해진 미국은 소련에 대해 미·소 양군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 받을 경계선으로 38도선을 제의했다. 미국의 경제원조를 기대하고 또 일본 점령에 참여할 속셈이 있었던 소련이 이에 동의했고, 38도선이 또다시 한반도의 분할 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11)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소련은 2차대전의 종전과 승리의 기쁨으로 소련의 모스크바 미국 영사관 앞에서는 성조기를 흔들었고, 미국 역시 소련과 함께 승리를 기뻐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유럽의 강대국들이 세계를 장악할 힘이 없어졌고, 이러한 세계의 대한 패권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견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냉전의 시작이 되었다. 이러한 냉전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까지도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미국은 소련의 공산주의가 세계를 장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을 소련의 정치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그 방위선으로 한반도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소련이 먼저 한반도에 도착한다면 공산주의에 대한두려움으로 이러한 제안을 하였던 것이다. 소련이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미국은 뒤늦게 한반도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정착하자마자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일제시대에 일했던 관리자들을 다시 기용하였다. 이로써 미군과 인민위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게 시작되었다. 제주도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차츰 좌익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익의 우세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제주도 점령정책을 전환시켜 나갔으며, 이때 발생한 '한라단사건'을 미군정의 그러한 시도의 관철을 평가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더구나 제주도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일제시대부터 미국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신탁통치안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신탁통치안에 따른 관련 정당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합의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이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자신들의 주도세력인 유엔에 상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반도는 5.10총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전국적으로 모든 곳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두 군데에서 투표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이로써 제주도에서는 미국과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의 우익세력간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해방직후에 제주도가 겪어야 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급증하는 인구의 문제였다. 해방 직후 제주도는 그 증가율이 25%이상 급증한 인구를 감당하여야 했으며,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2)
해방 직후 제주도의 특수한 사회현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귀환자의 물품반입과 경찰 등의 모리행위이다. 일제시대에는 제주∼대판 간 정기항로 개설과 5만 명에 이르는 노동력의 일본진출로 제주에서의 생필품 구입은 부산·목포보다 오히려 일본 대판 루트를 이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런 일본 지향 교역성향은 8.15를 맞으면서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東京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는 종전 직후 귀환조선인의 휴대물품과 금액을 철저히 제한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앞으로 자유롭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소지품 외에 천엔(담배 20갑에 해당되는 돈)만 소지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광산과 공장에서 낮은 임금과 고된 노동으로 벌어드린 조선인 노동자의 다른 모든 재산은 그냥 남겨 놓아야만 했다. 대판 등지에서 노동하던 수많은 제주도민 가운데는 빈털터리로 귀환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노동을 통해서 송금을 하던 도민들 귀환함으로써 제주도의 경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던 송금액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귀환자들은 고향에 되돌아 왔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직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해방후 제주도의 경제는 일본과의 정기여객선 뱃길이 끊기고 대일 교역마저 통제를 받게 되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장 먼저 피부에 와 닿는 문제가 생필품의 절대부족 현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도내 곳곳에서 귀환자도 실어 나르고 물품도 반입하기 위해 20∼50t급의 어선들이 현해탄을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물품반입 행위를 경찰에서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제시대의 전력 때문에 젊은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사오던 '일제 순사들'이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 경찰복을 갈아입고 '밀수품을 단속한다'는 미명아래 활동했다. 그들 가운데는 모리배들과 결탁, 본격적인 염탐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이런 사례들을 적발할 경우 법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뒷거래로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일이 많았다. 이런 모리행위는 미군정관리와 경찰 고위관부, 나중에는 서청 등 사설단체원까지도 끼어 들어 민심을 잃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3)
일본과 중국대륙 등지에서 귀환한 도민은 이제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행동양식 및 의식을 탈피하고 있었고 제주도민에게 새로운 경험을 전파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일본군에 종군하였던 군인, 군속, 징용노무자들과 중국에서 의용군, 팔로군의 적을 가졌던 인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후에 제주도민의 정치의식을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14)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15일에 결성되었다. 각 읍면 대표 100여 명이 참석하여 제주농업학교에서 島 단위 건준 조직을 출범시켰다. 이날 결성식에서는 임원진 선출에 이어 행정권의 이양문제, 치안문제, 당면한 경제문제등이 협의되었으며 일부에 의해서는 "행정부을 접수한 후 실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비록 공직에 몸을 담았던 사람일지라도 건준에 참여시키자"고 제안되었다.
건준은 좌우 세력이 총망라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좌우 세력의 갈등관계가 잠재화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인민위원회로 재편되면서 점차 좌우익의 갈등관계는 표면화되고 결국 인민위원회에서는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민위원회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정당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갔다.
건준 조직이 다른 지방에서는 명망가·유지 중심으로 조직되었지만, 제주도는 건준 시기부터 주요 구성원 대부분이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제주도도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제하 제주도 민족해방운동은 일반적으로 193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운동이 압도적이었다. 따라서 제주도 건준·인민위의 주요 구성원은 조선공산당의 조직원이었다.
제주도에서 건준·인민위원회 활동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치안대의 활동이다. 여기서 치안대는 일시적 조직으로 대원들은 청년동맹이 탄생되면서 거의 통합 또는 공존하게 되는데 치안대의 기능은 대부분 청년동맹에서 수행했다. 해방 후 일제 경찰이 자취를 감추면서 도·읍·면·리 건준, 인민위 산하에 청장년들로 구성된 치안대 또는 보안대가 구성되어 사회질서 유지, 친일파 처단, 일본 패잔병의 횡포 근절, 자체 방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민중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또 하나의 인민위 활동으로는 적산관리를 들 수 있다. 일제시대 제주도는 주정공장과 제약회사, 양말공장, 축산물 및 수산물을 원료로 하는 통조림, 패구공장 등 72개소의 화학, 제조업 작업장이 일본인에 의해 가동되고 있었다. 8.15가 되자 이들 공장에는 자주적 관리를 위해 각 단위 관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건준, 인민위가 결성되면서 이들은 산업부와 협의하여 관리를 해나갔다. 그러나 미군정이 제주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산에 대한 모든 관리는 군정 관리과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인민위의 주된 활동으로는 자치행정기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하고 미군정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행정, 경제적인 측면 못지 않게 두드러진 것을 정치적인 활동이었다. 이시기 인민위로 대변되는 제주도 좌익세력의 주요 정치활동은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와 입법의원 선거투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우익의 반탁투쟁을 민족분열적 행위로 규탄하고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하면서, 적어도 1946년 1월 1일 오후 2시까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월 2일에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은 조선민족해방을 확보하는 진보적 결정으로서, 이 결정은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하였고, 같은 날 조공은 중앙위원회의 명의로 이를 지지하였다. 이와 같은 신탁통치에 대한 조공의 갑작스런 입장 변화로 인하여 지방에서는 이민위원회나 공산당 조직에서 주관하여 반탁대회와 삼상회의 결정 지지대회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많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제주도에서도 중앙의 결정과 달리 1946년 1월 5일 인민위원회 주도하에 각 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탁반대궐기대회가 열렸다. 제주읍내에서도 2만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북국민학교 교정에서 반탁대회가 열렸다. 중앙에서는 이미 3일 전에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지지대회를 가졌는데도 이틀 후에 제주도에서 반탁대회가 열린 것은, 삼상회의의 긍정적인 부분이 알려지지 않고 다만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 5년제 실시라는 부분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인민위, 조공 제주도당을 비롯한 제주도 좌익세력은 삼상회의 지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처음에는 도민들에게 혼선을 가져오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였으나, 부락 내 세포원을 통한 해설작업 등의 노력으로 삼상회의 결정 지지운동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갔다. 이 결과의 이면에는 삼상회의 결정 그 자체보다 인민위로 대변되는 좌익세력에 대한 제주도민의 신뢰감이라는 부분이 더 많이 작용하였다.15)
Ⅲ. 4.3 항쟁의 발생배경
1. 정치적 배경
운송과 통신시설은 정치적 혼란의 시기에 두 가지 양상을 띌 수 있다. 게릴라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을 때 그것들은 게릴라의 상호연락을 용이하게 해주지만, 진압군에 장악되어 있으면 게릴라를 진압하는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상황에 따라 근대적인 지역과 후진지역 양쪽에서 힘을 발휘했다는 역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이나 진압군이 이 시설들을 재장악하면 그들은 좌익을 평정하는 데 그것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철도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대부분 단시일 내에 인민위원회가 몰락하였고, 운송·통신망이 취약하여 서울로부터 병력을 파손하기에 어려웠던 제주도나 강원도 혹은 내륙산간지방에 있는 인민위원회는 오랫동안 버티었다는 사실에서 "철도 등의 운송·통신시설의 발달을 포함한 근대화는 최소한 인민위원의 성장에 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인민위원회가 힘을 유지하는 데는 방해가 되었고, 후진성은 인민위원회의 성장을 고무시키지는 못했지만 일단 급진성이 나타나면 그것은 인민위원회가 오래 버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16)
일제의 지배와 미군정간의 정치적 공백기간은 일면 지리적 위치에 의하여, 일면 미군정의 가용인원 및 필요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군과 도일수록 뒤늦게 점령되었기 때문에 위원회의 존속기간은 길었으며, 공백기간이 길수록 인민위원회는 그만큼 더 강했다. 즉 "미군정이 들어온 시간상의 선후관계는 강한 인민위원회가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아주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17)
2,경제적 배경
경제적인 상황에서도 말하였듯이 인구변동은 제주4.3항쟁의 중요한 요인이다. 농촌사회의 인구증가와 이농현상은 농민을 전통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동원될 수 있게 한 중심적 요인 중의 하나였다. 자신들의 고향의 농촌환경으로부터 일본, 만주, 북한의 공업지대로 이전한 한국 농민들은 귀향하였을 때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노동자도 아니었다. 이들 중 특히 토지상실 등의 이유로 혹은 강제징집을 통하여 일본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좌익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가혹한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인구변동은 각 지방의 정치참여의 급진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지방적 수준에서 양 변수간의 상관관계는 명백하다. 즉 가장 폭동이 심했던 경남과 경북은 1930년과 1940년간의 인구유출이 각각 1,2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폭동이 심하게 일어났던 제주도 역시 1930년대 인구유출이 심했고, 1944년에서 1946년까지 26%이상의 인구증가가 있었다. 이러한 가설의 일반화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으나 광범위하게 살펴볼 때 심한 인구변동은 정치참여의 급진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변수였음에 틀림없다.18)
1945년 한반도처럼 토지소유관계가 불평등한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한 조건 때문에 야기된 농민의 깊은 분노는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하도록 하였으며, 인민위원회의 주장을 신뢰케 만들었고, 소작제도와 미곡수집 및 지주제에 대한 인민위원회의 공격이 농민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게 했다. 그러나 토지소유관계의 불평등이 직접 농민들을 급진적인 행동으로 나서게 하지는 못했다. 소작이 심한 지역에서 농민들은 소작으로서 자기들의 존재기반을 위협받지 않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반면에 그 지역에서의 지주의 권한은 그것이 특히 유동적이 국가경찰기구에 의해 보호를 받을 때 하나의 강력한 통치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남한에서 소작농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던 전북과 경기도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했던 것도 쉽게 소멸했으며, 반면에 다른 지역보다 상당히 많은 소작영농이 존재했던 제주도, 강원, 경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했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따라서 정치참여에의 급진성은 소작비율과 반비례관계에 있으며 결국 "지주-소작관계가 강할수록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어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불리했고, 정치참여의 급진성도 낮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19)
3. 사회적 배경
제주도는 전형적인 농촌사회이다. 당시 농업에 치중되어 있는 경제구조로 보였으며, 미분화된 직업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제주도는 한반도 전체 혹은 남한의 다른 지역과는 달이 소작농의 비율이 아주 낮았다. 제주도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지주-소작관계가 약하고 자영농이 비율이 높았다는 사실은 제주도는 논이 적고, 대부분 농지는 척박한 토질을 지닌 밭이었던 관계로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농지의 대부분이 밭이었고 또한 토지생산성이 매우 낮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대부분의 농민이 빈농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대부분의 농가는 보조적인 생계수단을 찾아야 했으며 그것은 해녀들의 나잠어업을 통하여, 혹은 일제시대의 경우에는 일본으로의 진출 등을 통하여 강구되었다.
또한 제주도는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폐쇄적인 혈연공동체 및 식수 등의 문제로 해안성에 집중되어 있는 집촌적 촌락구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운송 및 통신수단이 제한되어 있었다. 제주도가 폐쇄적 혈연공동체 및 집촌적 촌락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농민의 계층분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동일한 조건 아래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결합하여 "한 지도자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면 도민의 대다수가 불온사상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현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당시 제주도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운송시설 및 제주도내의 운송과 통신시설이 열악하여 남한 천체의 정치상황에 대한 정보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도민과 안면이 넓고 또한 '한로 뛰는' 좌익지도자들의 정치선전이 쉽게 침투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컸었다고 하겠다.20)
여러 인민위원회의 지리적 위치는 위원회의 힘을 평가하는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제주도와 강원도 및 경상도의 해안지방은 한 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민위원회가 지배하였으며, 중부의 산악지대 및 전남의 도서지방과 충청도의 북서해안지방에서도 역시 강한 인민위원회가 지배했다. 따라서 "지리적 고립성은 인민위원회의 존립 및 활동에 도움을 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21)
4. 직접적인 발생원인
1947년에 들어서자 전후의 국제정세에는 새로운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공산주의 봉쇄'를 위한 트루만의 선언이 공표 되어 미국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방지한다는 명목 하에 군비를 증강하고 군사기지의 신설이나 확장에 경주하였다. 제주도민은 대구나 서울에서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폭압이 자행됨에 30만 전도민은 분노의 불길을 태우며 31.독립운동기념대회에 결집하려는 목표 하에 전 조직력을 동원하여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선 민전은 그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해 당국과 끈질기게 교섭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응하기는커녕 도리어 전라남도 각 경찰서에 경찰응원대의 급파를 요청하고 폭력으로 대응할 결의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3.1기념일 몇 일전부터 전도에 경제체제를 펴고 군정청, 검찰청, 경찰서나 기타의 요소에 바리케이드를 치며 무장경관을 비상경비에 들어가게 하는 한편, 새로이 기마대를 편성하여 진압훈련을 행하는 등 탄압조치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와 같은 험악한 정세 속에서 3.1독립기념일을 맞이했던 것이다. 3.1혁명적 정신으로 한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자 등의 슬로건이 쓰여진 현수막을 높이 내걸고 강철같은 스크럼을 짜고 교가나 해방가를 목청껏 불렀다. 시내의 교직원들도 그 대열에 참가하여 학생들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집회가 열리려던 바로 그 순간에 패트릿치 대위의 지휘하에 제주경찰서장 강동효가 이끄는 기마대와 기동대가 갑자기 모여있는 대중의 대열로 돌진하여 위협발포를 하면서 즉시 해산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학생대열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해산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지배자는 경찰의 불법행위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민중에 대하여 부당한 탄압을 강행했다.22) 경찰은 3.1절 시위사건 이후의 검거가정에서 약 2,500명의 청년들을 구금하고 이중 3명을 고무 치사케 하였으며 후에 이 시체를 가에 던져 버리려고 시도함으로써 도민들을 격앙케 하였다. 이날의 사건은 중요한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도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다.
4.3의 배경 가운데 3.1사건은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4.3'의 도화선이라고 불리는 3.1절 발포사건의 성격과 그 뒤에 전개된 사태 진행과정을 제대로 살펴봐야만 4.3의 발발배경도 바로 볼 수 있다.
첫째는 1947년 3.1절 집회와 시위에서 정치적인 슬로건이 전면에 내세워졌다는 점이다. 그 슬로건은 '모스크바 3상회의 절대지지',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촉구', '3.1정신으로 통일 독립 전취'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구호들은 그 무렵 남한 좌파세력이 즐겨 사용하는 지향과제였지만 한편으로 보면 3상회의 결정사향과 미·소 공위의 재개 등은 그때까지도 미국의 표면적인 공식외교정책이기도 하였다.
둘째는 이날 기념집회에 제주 역사상 최대의 인파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군정 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만 대략 3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이 참여했다.
셋째는 이날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발로사건이 모두 일주일 전에 제주에 들어온 응원경찰들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이다.
넷째는 경찰 당국이 도립병원 앞의 발포에 대해서, '물리력을 사용한 행위'였음을 시인하면서도 관덕정 앞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관덕정의 발포사건도 시위군중이 현장을 지나간 다음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발포사건의 희생자들(사망6명, 중상 8명)도 관람군중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초등 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등이 숨진 피해현장은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져 있던 은행건물의 처마밑, 또는 골목 한 모퉁이였다. 또 총탄에 쓰러진 피해자를 검안한 결과 한 사람을 빼놓고는 전부 등 뒤쪽을 맞은 것이 판명되었다.
여섯째는 경찰의 무모한 발포에 항의 대규모 도민 파업사태가 전개된 점이다.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관공서·은행·학교·통신기관·회사 등 모두 166개 기관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제주 읍내에서는 경찰서와 도립병원 등 3개 기관만 빠진 유례없는 대파 업이었다.
일곱째는 전국적으로 벌어진 3.1소요사건 진압에 미군이 직접 개입한 곳은 제주도가 유일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날 제주 이외에도 서울·부산·정읍·순천·영암 등 전국 각지에서 3.1절 시위행렬이 충돌하거나 경찰의 발포로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군중해산에 미군이 동원된 곳은 제주도 뿐으로,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미군이 제주지역 군중을 해산시키는 데 지원했다"는 표현을 쓴고 있다.
여덟 번째는 미군정이 이 사태를 중시해 카스틔어 대령을 반장으로 한 미군조사반을 파견, 정세 분석한 뒤 강공정책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미군조사반은 총파업의 원인을 "무모한 경찰발포로 인하여 증오심이 고조됐고, 이런 도민감정을 남로당에서 선동, 증폭시키고 있다"고 분석하면서도 사태해결의 후속조치로서 전자의 '경찰의 행위'는 덮어 둔 채 후자의 '남로당의 선동' 부분을 부각,. 좌파세력의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펴 갔다. 그런 후속조치가 바로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대의 현재 파견이었다.
아홉째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내도와 응원경찰대의 증파, 특별수사대, 그리고 서청의 파견이 곧바로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 검거선풍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3.1사건 직후 경무부 관리들이 공공연히 "제주도민 90%가 좌익색채를 띠고 있다"고 발언하고 있는 점,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정치적으로 동조하는" 듯하다, "여러 가지 보고에 따르면 섬주민의 60∼80%가 좌익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열 번째는 결국 미군정이 3.1절 발포사건을 수습을 위한 문제해결의 열쇠를 그 당시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던 경찰 측에 넘김으로써 도민선무에 실패한 채 돌이킬 수 없는 대립의 갈등구조로 치닫게 하는 결과를 빚게 했다는 점이다.23)
Ⅳ. 4.3 항쟁의 과정과 결과
'1.과정
4월 3일 봉기가 발발한 후, 일정 기간 동안 민중무장대는 경찰과 서청 등 자신들을 탄압하던 단체들만을 골라 제한적으로 공격하였다. 경비대는 물론 일반 행정기관들도 이들의 공격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는 4월 3일의 제주도민들의 봉기가 무차별적인 폭동이 아니라, 자신들을 탄압하는 조직과 인사들에 대한 제한적이고 방어적인 저항의 표시였음을 보여준다. 이 때 제주도의 폭력의 강도는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던 다른 지방보다 특별히 더 높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자신들이 추진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으로 인식하였다.
미군정이 진압을 위해 이렇게 대규모의 군, 경찰, 청년단을 증파했지만 제주도의 중심부인 제주시를 제외하고는 봉기 초기에 각 부락은 민중무장대에게로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이는 마치 일제가 붕괴된 해방 직후의 사태를 연상케 했다. 초기의 공세가 일정하게 성공을 거둔데 다가, 미군정이 강경대응 일변도로 나오자 남로당 제주도 당부에서는 4월 15일 도당대회를 소집하여 일회적이고 폭동 적인 성격의 봉기에서 장기적인 유격투쟁으로 이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중무장대는 또한 좀더 본격적인 투쟁을 위해 봉기 결행 당시의 조직이었던 기존의 자위대를 개편하여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4월 16일에는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이름으로 단선을 반대하는 '5.10 망국단선 반대를 위한 무장봉기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이 이후에는 공격대상을 경찰과 청년단에서 선거사무소를 비롯한 선거관련기관으로 확대하였다. 일부에서는 다수의 경찰복 착용자들이 선거사무소와 경찰지서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민중무장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점차 유혈사태로 격화되자, 미군정과 민중무장대 양측에서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4월 28일에 인민유격대 사령과 김달삼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제 9연대 연대장 김익렬 사이에 평화회담이 열렸다. 봉기의 초기 시점부터 경찰이나 서청 등이 강경진압을 주장한 데 반해, 국방경비대는 '제주도민들의 봉기는 경찰과 서청의 행위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며 폭력적인 진압을 반대하고 있었다. 양측은 이 회담에서 동족간의 유혈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태의 평화적 수습에 합의하고 전투행위를 중단했다. 이로써 제주도 전역에서는 일시 평화가 회복되었다. 봉기가 발발한지 25일 만이었다.
이 합의는 봉기를 결행한 제주도 민중들과 저항 지도불가 자신들의 최소한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정도로도 무장봉기를 중단하려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주도 민중들의 불만을 수습하고 봉기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정도의 요구는 수용해야 된다는 국방경비대의 인식의 반영이기도 했다.
4월 3일의 봉기는 여기에서 원만히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군정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계속 좌익으로 의심했고 4월 28일의 합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군정 경찰은 이 합의를 깨기 위하여 5월 3일 미군과 국방경비대 9연대 병사의 안내로 귀순 중이던 일군의 귀순자들을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결국 4.28합의는 깨졌고, 상대방 때문에 합의가 깨졌다는 쌍방간의 비난성명전에 뒤이어, 이미 귀순한 사람들이 살해되는가 하면 귀순 중이던 유격대와 민중들이 다시 입산하였다. 경찰과 유격대의 충돌로 제주도는 다시 살인과 방화가 재연되었다.
충돌이 재연되자 미군정장관 딘은 군정청 고위간부들을 대거 인솔하고 직접 제주도를 방문하여 대책수립에 착수하였다. 5월 5일 제주도 군정청에서 긴급 고위비밀대책회의가 열렸다. 대책회의는 그러나 사태의 원인과 대책을 놓고 군·경 간의 갈등이 폭발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경찰은 사태의 원인을 국제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전에 계획된 폭동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강경진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경비대는 사태의 원인과 악화의 책임은 경찰의 과잉진압과 기강문란과도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경찰도 경비대의 관할 아래 두어 사태의 진압은 경비대가 맡아야 하고 진압방법도 무력위압과 귀순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밀대책회의가 결렬되자 미군정에서는 곧바로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군정 경찰의 파괴로 평화회담마저 결렬되고 단선이 다가오자 유격대는 공세를 재개했다. 각지의 선거사무소가 습격 당하고 선거관계 공무원들이 납치되거나 살해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치러진 제주도의 선거는 투표자가 45,862명밖에 되지 않았다. 대등록자비 52%, 대 유권자비 35%에 불과한 이 투표율은 전국의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각각 43%와 46.5%의 투표율을 기록함으로써 선거로 인정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군정장관 딘은 국회 선거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5월 24일 제주도 북제주군 2개 선거구의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6월 23일로 연기하여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상황은 6월에 들어서도 선거를 치를 정도로 호전되지는 않았다. 결국 6월 10일 딘은 행정명령 22호를 발표, 제주도 북제주군의 두 선거구의 선거를 무기 연기했다. 제주도에서의 이 선거실패가 갖는 의미는 제주도라는 한 지역적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미군정의 단독선거정책의 실패를 의미하였다.
미군정과 단선추진세력은 자신들의 단선단정정책을 파탄시킨 제주도의 저항세력들에 대한 더욱 강경한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박진경과 그를 뒤이은 지휘관들의 강력한 토벌로 선거 전후와 같은 공세를 취할 수는 없었다. 강력한 토벌로 인하여 제주도의 4.3 민중항쟁이 유혈 적인 사태로 치닫자 서울의 많은 사회단체와 정당들은, 민심수습을 통해 무력공세가 아닌 사태의 정치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정당 사회단체들이 제주사태의 원인이 경찰과 청년단에 있으므로 무력진압이 아닌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으나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주도에서의 저항은 정부 수립 직전 한 달 이상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대립은 다시 격화되었다. 이 시점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지난 몇 달 간 계속된 청년단과 경찰의 탄압이나 경비대의 토벌을 피해 입산해 있었고, 일부의 행정관리들조차 입산 자들의 편에 가담하였다.
8월 14일 군은 2개 중대를 증파하여 토벌작전을 준비하였고, 제주도 저항세력들은 같은 날 도 전역에서 '조선이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고 동시에 봉화를 올렸다.
10월 8일 정부는 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어 10월 11일에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는 대토벌작전을 위한 준비조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토벌을 위해 본토의 군병력(여수 주둔 제10연대)을 투입하고자 내린 출동명령에 일부 병사들이 출동 직전인 10월 19일 '동족 상잔을 강요하는 제주도 출동명령 거부'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전장은 본토로 확대되었다.
14연대반란사건으로 인한 희생자가 2천여 명이고 피해자 및 가족들이 40여 년간 빨갱이 및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연좌제에 묶여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못했던 것 등등이 4.3사건과 흡사하다. 하지만 도민들의 꾸준한 노력과 재조명을 통하여 빨갱이로 몰렸던 희생자들의 누명도 벗겨지고 사건명도 4.3항쟁으로 공식적으로 바뀌고 보니 만일에 1948년 10월 19일 14연대가 제주도로 출동하여 무고한 도민들을 진압학살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소름이 끼친다.
본토에서의 군인반란을 계기로 제주도 저항세력들은 10월 24일 정부에 '선전포고'를 했다. 여수에서의 군인들의 반란 이후 정부군의 대응은 훨씬 강경해졌다. 이 때부터의 대결은 일방적이었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병력과 무기로 정부군은 저항세력을 압박해 갔다.
정부군은 한라산 전체를 포위하여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공격했다. 유격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고 유격대의 근거지를 빼앗아 효과적인 진압을 하기 위해 마을 전체를 불살라버리고 집단부락을 건설하여 주민들을 집단이주시키는 전략촌 소진, 소개작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진압방법은 역시 물리력에 의한 토벌이었다. 1949년 3월에 국무총리 이범석은 "제주도의 비극은 미군정에 의해 채택된 무력에 의한 진압방침에 큰 책임이 있다"면서 "정부는 진압과 선무공작을 병용하는 5분 정치, 5분 군사작전으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사태가 거의 끝난 시점이었다.
2. 결과
1949년 봄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유격대의 놀란 만큼 끈질긴 움직임은 대한미국에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남한은 제주도에 관한 일련의 조치를 결정했다. 유재홍 대령이 지휘하는 특전사가 창설되었고 제주도로 보충병력이 파견되었다. 내각과 대통령의 개인적인 사절들이 제주도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한 춘계공세를 감시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게릴라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공보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행동의 절정은 봉기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던 4월초, 이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 회복을 과시하기 위해 이루어진 이승만의 방문이었다.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마지막 조치는 국회에 공식으로 남아 있는 2석의 제주도의 지역구 의원을 뽑기 위한 5월 10일 선거 실시였다.24)
선거 미실시로 공석 중이던 2명의 제주도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 1949년 5월 10일 치러진 선거 또한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투표에는 연기되었던 제주도 방문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다시 하게 된 유엔위원단이 참관하였다. 전년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선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유권자의 96%라는 놀라운 숫자가 선거에 참여하였지만, 절대적 투표자 수는 적었다. 제주도 두 개 선거구 중 하나인 을 선거구에서 기표한 자는 5,766명에 불과하였다. 절대적 측면에서 선거인 수가 줄어든 것은 아마도 폭동으로 인한 섬 인구의 감소, 투옥된 수많은 게릴라 용의자 및 여타 공산주의 동조자에 대한 공민권 정지의 사정을 반영해 주는 것일 것이다.25)
Ⅴ. 결론
4.3의 비극은 과거지사가 아니다. 수많은 제주도민의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혹은 형이 혹은 삼촌이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토벌대의 총에 사살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붉은 것으로 낙인찍혀 연좌제의 사슬에 매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제주의 인물난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4.3은 또한 제주도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는 등 막대한 정신적 피해도 가져왔다. 4.3의 진행과정이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듯이 4.3 진상규명의 역사 또한 한국현대사의 빛과 어둠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제주도의 4.3 항쟁이 아직까지도 말못해지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한반도에 남한정부가 성립되는 과정에 있어서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어 진다. 분명히 시간상·상황으로 보았을 때 제주 4.3항쟁과 남한정부의 수립은 맞물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제주도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의 농민항쟁의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시대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반란의 전통과 함께, 해방이 된 조국이었지만, 일제로부터의 계속적인 침략과 세계 2차대전의 패배가 짙어지자 제주도를 최후의 공격지로 생각하여 제주도를 전장으로 만들려고 했던 일본군과, 한반도에 도움을 줄 것처럼 점령한 뒤, 제주도민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악순환으로 만들었던 침략자들에게 이미 제주도민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제주도를 만들어 가기를 원했지만, 미국과 우익은 그러한 상황을 그냥 두지 않고, 물리력을 사용해 진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출발점부터 우리는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하루빨리 청산하여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로 찍힌 영화 '레드헌트'를 보면 할머니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빨갱이라는 누명이라도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물론 제주도의 4.3항쟁이 공산당의 활동과 맞물려 있었지만, 도민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되는 바대로 행동했기 이러한 흑백논리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제주4.3사건 당시 숨졌거나 해방불명된 1715명이 처음으로 제주4.3특별법에 의한 희생자로 인정돼 그 동안 '남로당 사주에 의한 폭동'등으로 규정됐던 4.3의 명예회복이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제주도에 제주4.3항쟁의 공원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물론 공원의 건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 보다고 중요한 것은 4월 3일이 되면 한번쯤 4.3항쟁의 주된 세력들과 그 사람들이 왜 싸워야만 했는지 그리고 아무런 잘못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3항쟁의 발생의 동기가 되었던 3.1절 기념행사에서 외쳤던 통일정부수립이 하루빨리 다가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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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역사연구회엮음, 《한국역사입문③》, (풀빛, 1996), pp. 545-47
2) 양상식, 《한라산의 메아리》,
(제주: 국립제주대학교, 1977), pp. 25-50
3)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역사》(서울: 을유문화사, 1962), p.
394
4) 유홍렬, 앞의 책, pp. 384-85
5) 유홍렬, 앞의 책, pp. 392, 424
6) 노민영, 《잠들지 않는
남도》, (온누리, 1988), pp. 19-25
7) 濟民日報 4.3취재반, 《4.3은 말한다》,(전이원, 1994) pp.
25-6
8) 아리리 연구원, 《제주민중항쟁Ⅰ》, (소나무, 1988) pp. 84-5
9) 노민영, 《잠들지 않은 남도》,
(온누리, 1988) pp 25-6
10) 아라리 연구원, 《제주민중항쟁Ⅰ》, (소나무, 1988), pp 70-74
11) 강만길,
《고쳐 쓴 한국 현대사》, (창작과 비평, 1994), p. 207
12) 아라리 연구원, 《제주민중항쟁》, (소나무, 1988), p.
87
13) 濟民日報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전이원, 1994) pp. 54-5
14) 아라리 연구원,
《제주민중항쟁Ⅰ》, (소나무, 1988), pp. 87-8
15)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제주4.3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제주
4.3연구》, (역사비평사, 1999), pp. 59-68
16) 아라리 연구원, 앞의 책, p. 77
17) 아라리 연구원, 앞의
책, pp. 78-9
18) 아라리 연구원, 《제주민중항쟁Ⅰ》, (소나무, 1988), pp. 76-7
19) 아라리 연구원, 앞의
책, p. 79
20) 아라리 연구원, 앞의 책, pp. 80-3
21) 아라리 연구원, 앞의 책, p. 78
22) 노민영,
《잠들지 않는 남도》, (온누리, 1988) pp. 115-8
23) 濟民日報4.3 취재반, 《4.3은 말한다》, (전이원, 1994),
pp. 253-7
24) 노민영, 《잠들지 않는 남도》, (온누리, 1988) p. 64
25) 노민영, 앞의 책, p. 69
(출처 : '해방 전후 제주 상황과 4.3항쟁'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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