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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단기선교 및 성지순례 여행기

[스크랩] 사해바다, 맛사다

by 서귀포강변교회 2009. 2. 4.

 사해(The Dead Sea)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해는 그 수면이 주변의 지중해보다 398m나 낮아 지구 표면에서 가장 움푹 들어간 곳으로, 그 남북 길이가 75㎞이고 동서 폭은 긴 곳이 17㎞이며, 둘레는 200㎞에 이르는 규모가 꽤나 큰 "갇힌 바다"이다.
이 곳의 해수는 염분 함유량이 보통 바닷물보다 10배 가까이나 높아서 누구라도 물에 들어가면 수영을 하지 않아도 가라앉지 않고 뜨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한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도 미용을 위해 노예들을 시켜 사해의 검은 진흙을 가져오게 했다고 전해질만큼 이 곳 진흙의 미용효과는 고대부터 알려져 있다.    
 

 

 

 

 

 

 

 

 

 

 

 

 

 

엔게디
쿰란에서 20km 정도 남쪽, 사해 서안 중앙부에 있는 샘으로 원뜻은 염소들이 마시는 샘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네게브 사막의 북쪽이며, 여호사밧왕 때에 유대를 침공하는 동맹군이 진을 쳤던 곳이기도 하다. 솔로몬 왕에 의하면 샘에 물이 흘러 오아시스를 만들어 부근에 종려나무와 포도원이 고벨화가 아름답게 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사울과 다윗왕의 이야기이다. 사울이 다윗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삼상18:5) 블레셋과 전쟁을 하였는데, 승전을 하고 개선할 때, 이스라엘 여인들이 다윗을 환영하며 칭송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하였다. (삼상18:7)
이에 사울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다.(삼상18:6-11) 다윗은 엔게디로 도피하여 그곳 황무지의 굴속에 숨었다. 그 때 사울이 삼천명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하였다. 추적 중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르러 굴이 있는지라 사울왕이 쉬러 들어갔다. 그때 바로 그 굴에 다윗이 숨어 있었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사울인지라 보복하지 않고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었다.(삼상24:4) 그리고 굴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말하기를,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나의 아버지여 보시오.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시오. 나는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한 죄가 없나이다." 라고 하였다.(삼상24:8-11) 이에 사울이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라고(삼상24:17) 말하며 다윗을 축복하고 헤어졌다.(삼24:18-22)

 

 

쿰란
사해의 북서쪽에 있는 쿰란은 사해 사본(the Dead Sea Scrolls)을 기록한 엣센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이 있었던 곳이다.
이 지역의 발견은 1951-1956년에 이루어졌는데, 폐허 속의 주건물은 폭 27m 길이 44m정도로, 석고가 거칠게 발라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북쪽에는 수비탑이 있으며 부엌과 붙어있는 식당에서는 1,000여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주건물 주변에는 옹기장이집, 방앗간, 염색집, 7개의 저수탱크 등이 발견되었으며, 의자, 책상, 말라버린 잉크가 담겨진 잉크스탠드가 있는 기록실이 발견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쿰란 주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800여개의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으로서,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은 것들이다.
약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해구약 사본은 현존하는 구약 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에스더서만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로마에 맞서 저항하다 장열하게 모두 전사한 이스라엘 결사대 맛사다유적

 

 

 

 

 

 

 

 

 

 

 

 

 

 

 

 

 

 비운의 절벽요새, 맛사다(Massada)

맛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으로 사해의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00여m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정상이 길이 600M, 가장 넓은 곳이 폭이 250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이 곳은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가 기록한 "유대 전쟁사"를 통하여 맛사다가 헤롯왕의 요새인 동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했던 "유대 전쟁(Jewish War)" 최후의 비극의 격전지였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 66년부터 시작된 이 반란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명의 "열심당원"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맛사다를 점령하며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 로마에 대항하였다.
예루살렘을 이미 점령하여 유대인 반란의 진압을 이미 달성한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10군단을 이끌고 이곳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하였다. 로마군은 2년에 걸친 무수한 정상 공격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요새 꼭대기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시키기 위한 공성퇴(Battening Ram)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거대한 경사로를 6개월에 걸쳐서 축조하였다.
유대인들의 격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성퇴가 성벽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이면 로마군이 성벽이 파괴된 곳으로 진격해 올 바로 그날밤에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Eliezer ben Yair)는 모두를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내일 아침 로마 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 밤에 우리가 스스로 자유스럽게 영광의 죽음을 선택 합시다."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족의 가장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명을 추첨하여 그 열명이 나머지 남자들을 죽였고 남은 열명이 한명을 추첨하여 아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다. 3년 동안의 한 맺힌 포위 작전에 대한 영광의 대가를 바랬던 로마군인들은 960구의 시체 앞에 망연자실하였다.
이 비극의 전설은 오늘날까지 승화되어 맛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군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되고, 이곳에서 그들은 "Never Again!"을 외치면서 1948년에 독립한 이스라엘이 다시는 외적에 의해 정복당할 수 없다는 비장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출처 : [가족친구여행]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
글쓴이 : Tour Star 원글보기
메모 : 1998년 성지순례의 감동이 지금도 몰려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