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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십자가의 무게

by 서귀포강변교회 2011. 4. 22.

십자가의 무게

  
                                          


  ▲ 영국 연극무대에서 30여년을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만을 맡아온 배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온 여행자 부부가 연극 연습장에 들어섰는데, 무대 위에 십자가가 놓여있는 것을 본 부인은 문득 자기 남편이 십자가를 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졌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가서 어깨에 십자가를 메려고 했지만, 그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들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모형으로 만든 소도구 小道具인줄만 알았던 십자가는 무거운 통나무로 만든 진짜 나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를 메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남편은 결국 포기하고 나서 곁에 있던 예수 역의 배우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연극일 뿐인데 당신은 왜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역힐을 맡은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만일 십자가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고 흉내만 낸다면, 나는 예수님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멘다고 그것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진짜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이 연극배우는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절실히 표현하기 위해 보통 사람이 들기 어려운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극배우의 고통스런 연기는 단순한 흉내만이 아니라 정말로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무게 때문에 실감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연기를 하는 데에도 이만큼의 진지함이, 이런 정도의 땀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 중죄인 重罪人의 양팔과 발에 못을 박고 매달아 처형하는 십자가 책형 磔刑은 로마시대에 처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집트 카르타고 앗시리아 페니키에 등 고대 동방에서부터 사용된 처형도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 Herodotus의 저서 '역사'에는 십자가형이 페르시아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주술적 呪術的 상징물로 사용되던 십자가가 그것에 함축된 종교적 의미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형 틀로 이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십자가는 흔히 라틴형인 †형 型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변형도 매우 다양합니다. 라틴형 십자가 가운데에 둥근 원이 있는 켈트 형, 가로막대(patibulum)와 세로막대(stipes)의 길이가 같은 +자의 그리스 형(crux amisa), 산스크리트어의 스와스티카(swastica) 또는 그리스어의 감마디온(Γdion)처럼 십자가의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진 갈고리 형(卍), 세로막대가 가로막대의 위로 올라가지 않은 T자의 타우 형(crux comisa, 일명 성 안토니의 십자가), 타우 십자가 위에 둥근 고리가 덧붙은 형태의 앵크 형,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로 알려진 X자 형(crux nacusata), 가로막대 하나를 더 걸친 이중형(‡), 이중형에 한 개의 가로막대를 더 걸쳐 로마 카톨릭의 교황을 상징했던 삼중형, 그리스 알파벳 키(Ⅹ)와 로(P)를 합친 형태인 키로 형 등 십 여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그중에 키로 형은 십자가 책형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환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이후 '그리스도의 상징'(PX)으로 불려왔습니다.

 

  ▲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사형방법인 화형 참수형 십자가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로 알려진 십자가형은 채찍으로 사형수를 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피를 많이 흘려 빨리 죽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이때 사용하는 채찍은 동물의 뼈나 유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맞으면 살덩이가 쭉쭉 찢겨 나간다고 합니다. 죽음의 고통을 단축시켜주기 위해 더 많이 채찍질을 하는 '역설적 자비(?)'인 셈입니다.
  채찍질을 한 뒤에는 처형수의 목과 양팔에 나무 십자가를 묶어 형장에까지 스스로 메고 가도록 함으로써 공개처형의 전시효과를 노렸습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는 가로막대와 세로막대가 각각 40kg로 전체 중량이 80kg쯤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라는 이름의 '슬픈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마태복음 27: 31∼32).

 

  십자가에 매달린 처형수는체중에 의해 점점 몸이 아래로 처지면서 못 박힌 부위의 살이 찢어지고 호흡곤란과 질식현상의 고통으로 전신이 경련을 일으키며, 혈액의 손실로 갈증이 심해지고 고열 高熱에 시달리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후에 사망하게 됩니다.
  사형수가 동정을 받을 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경골을 부러뜨리거나(요한복음 19:32)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요한복음 19:34) 고통의 시간을 짧게 해주기도 하지만,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연기했는데, 주인공의 강인한 의지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눈과 귀와 생각마저도 말살시키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라고 저주했던 십자가형의 고통이 관객에게 절실히 와 닿지는 못했습니다.

 

  ▲ 이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메고 비아 돌로로사의 길을 걷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정작 십자가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한 오늘날 신앙계의 모습은 안타깝기보다는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예배드리는' 것을 '예배본다'고 말합니다. 이것처럼 딱 들어맞는 말도 없다는 느낌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고 다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따로 있고, 신도들은 마치 관중인 양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다는 느낌이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당 정면에 걸린 십자가가 신앙의 무게로 다가오기는커녕 80kg 짜리 나무의 무게만큼도 느껴지지 못한 채 단지 종교적 장식물처럼 치장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관중'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일 수 없겠습니다. 관중 앞에는 다만 연기 演技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예배를 진행하는 이들이 십자가의 무게를 제대로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배를 보는 관객들과 예배를 보여주는 연기자들은 있을지언정, 십자가를 진 삶의 무게 아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80kg의 나무 십자가를 메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땀을 흘리는 저 연극배우만도 못한 마음가짐이 아닌가!

 

  ▲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했습니다(마가복음 8:34). 이것은 제자들 뿐 아니라 말씀을 듣는 무리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배를 진행하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곧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제시된 요구입니다.
  이 말씀을 나는 '예배를 진행하는 성직자와 예배에 참여한 평신도들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십자가의 무게를 제대로 깨닫고 있지 않으면 참 예배가 될 수 없다. 십자가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지 않는 삶은 참 신앙의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고통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는 희생의 수고입니다. 눈앞에 보여주는 십자가가 아니라 몸으로 짊어지는 십자가라면 피와 땀과 눈물의 수고가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시각 視覺으로 감지 感知되는 십자가가 아니라 삶의 중력 重力으로 온 몸을 눌러오는 십자가라면, 인기와 명예와 안일과 탐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조금치도 없습니다.
  2천년 전 골고다 언덕 위에 여섯 시간 가량 서 있었던 처형대가 아니라 오늘 신앙인들의 삶의 자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십자가라면, 재정의 비리 非理니 목회의 세습이니 또는 무슨 추문 醜聞이니 스캔들이니 하는 따위의 허튼 짓거리들이 들어앉을 자리는 분명코 없어야만 합니다.

 

  ▲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 오오, 때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찬송가 136장의 가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에 두렵고 떨리는 삶으로 서있는 사람이라면, 거짓과 핑계의 말을 알 턱이 없고 향락의 부끄러운 자리를 흘낏거릴 눈길이 있을 리 없습니다. 속임수와 거짓말과 변명의 입술로 십자가에 입을 맞추려 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다만 가룟 유다의 후예일 따름입니다(마가복음 14: 44∼45).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피가 온통 머리 쪽으로 쏠려 뇌혈관이 툭툭 터지는 극도의 고통 속에 죽어갔다는 전설입니다. 사도 안드레가 그리스의 바트라에서 매달렸다는 X자형 십자가는 머리를 고정시킬 곳이 없기 때문에 목과 어깨에 상상할 수 없는 긴장의 고통이 내리꽂힌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도들의 삶이요 죽음이었습니다.
 
  ▲ 월드컵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의 훈련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옥훈련'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전후반 경기 90분간의 영광을 위해서도 지옥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물며 한 평생의 의미가 담긴 십자가의 노정 路程이랴! 
  피와 땀과 눈물을 쏟지 않는 장식용 십자가는 서로가 속고 속이는 허망한 종교적 유희 遊戱일 뿐, 인격과 삶의 신앙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무게를 지니지 못한 신앙이라면, 볼테르 Voltaire가 내뱉은 조롱처럼 '성직자는 배우, 신도들은 관객이 되어 서로가 속고 속이는 인류 최대의 희극 喜劇이요 생애 최고의 거짓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연극배우의 고백은 이제 신앙인들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신앙인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