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세습하다니? 그건 자녀에 몹쓸 짓"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입력 2012.02.20 03:25 수정 2012.02.20 17:22
"자녀에게 교회를 물려준다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축복은 저주나 다름없다. 돈이나 자리, 권력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은 자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올바른 일에 쓰라고 하나님이 맡긴 것이다."
한국 복음주의운동의 '맏형' 홍정길(70) 남서울은혜교회 원로 목사가 지난주 은퇴했다. '복음주의 운동'이란 "오직 성경대로 살자"는 신앙운동. 지난 12일 밀알학교 강당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신처럼 따를 만한 목사가 있어 위로가 된다"고 했고, 한국기독교교회협(NCCK) 총무 김영주 목사는 "내가 만난 이들 중에 제일 큰 목사"라고 했다. 18일 서울 일원동 밀알학교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 [조선일보]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는 “나는 배움이 짧아 무슨 대단한 철학이나 비전도 없다. 그저 진리를 삶으로 산다는 기쁨으로 순종하며 걸어왔을 뿐”이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한국 교회가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교회는 성경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원칙을 살펴봐야 한다. 세습문제를 보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대로 유니크한 삶을 살도록 했는데, 부모의 성취를 그냥 물려준다면 그건 자녀의 삶에 대한 모독이다. 돈이나 자리, 권력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으면 저주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축복은 저주가 될 수밖에 없다. 청교도들의 '청지기 의식(stewardship)'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올바른 일에 쓰라고 하나님이 맡긴 것이고, 세상 떠날 땐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교회 밖 세상은 가난한데, 헌금으로 교회 건물을 높이 올리는 데만 신경쓴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교회가 그런 비판에 좀 더 겸허해져야 한다. 교회의 사회 구제활동이 '구색 맞추기'로 비쳐선 안된다. 교회가 왜 큰 건물과 사무실이 필요한가. 식당이든 예식장이든 빈 공간만 있으면 예배 드릴 수 있다. 교인수도 어느 수준 이상 커지면 용기있게 나누면 된다. 하나님 일에 기득권 따위는 없다. 목사는 경영자가 아니라 목양(牧羊)하듯 각각의 영혼을 돌보는 목자(牧者)다."
―어떻게 20년 가까이 굶주리는 북한 아이들을 돕게 됐나.
"1990년대 말 평양 에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대표를 지낸 분의 부인이 나를 서울로 찾아왔다. 평양 영아들 영양표본조사를 했는데, 3000명쯤 진행하니 당국에서 그만두게 했다는 거였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평생 지적·발달장애가 생길 위험이 있는 '절대 영양결핍' 아이가 16.8%였다. '전쟁 중의 소말리아도 영아 절대 영양결핍 비율은 12%를 넘지 않았다. 당신 나라의 한 세대 전체가 지적장애를 갖게 된다. 이 저주만큼은 한국교회가 막아야 한다'며 내 손을 붙들고 울더라. 북한 당국이 발로 차내더라도, 우리 정부가 막아서더라도 북한 아이들은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1993년 설립한 사단법인 남북나눔운동은 국내 북한지원 민간단체 60여개가 북으로 보낸 지원물량의 30% 안팎을 꾸준히 차지할 만큼 주도적 역할을 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내건 '자본주의 4.0'이 이슈다. 남서울은혜교회를 시작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장애인 돕기 사역을 위해서라고 들었다.
"신앙인에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북한 동포든 조선족이든 장애인이든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1976년 어렵게 개척해 성장시켰던 남서울교회 담임목사직을 1992년 내려놓았다. 무작정 '퇴직금으로 장애아들을 거둬야겠다'고 생각했다. 1997년 학교 설립 때까지 5년이 넘게 걸렸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장애인시설을 짓겠다니 주민들 반대가 엄청났다. 지금은 220여명의 아이들이 초중고와 직업교육까지 15년 과정을 공부한다. 밀알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남서울은혜교회에는 주일날 장애인 650여명을 포함해 6000여명이 함께 섞여 예배를 드린다."
―장애인들에겐 교육뿐 아니라 졸업 뒤 자활이 더 어렵다.
"교회 옆 작은 빌딩 5층에 단순용역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공장을 마련했다. 수서에도 직업재활센터가 있고. 재활용품을 기증받아 수선·보수한 뒤 싼 가격에 저소득층에게 파는 '굿윌스토어'도 열었다. 지금까지 53명을 고용했다. 얼마 전엔 장애인 자활 그룹홈 사업도 시작했다. 부모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다. 교육-직업훈련-자활-정착까지 장애인의 생애 전 단계를 도와줄 수 있는 모델이다."
―목회자로 37년을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했던 일은 무엇인가.
"큰아들에게 결혼하기 전날 물었다. 나하고 살면서 제일 서운했던 게 뭐냐고. 아들이 '어릴 때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며 울더라. 충격이 컸다. 교인들이 밖에서 누가 내 안부를 물으면 '목사님 요즘 교회 잘 안 들르신다'고 농담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여러 사역을 돌보느라 정작 내 아이와 내 교인들에겐 '찾으면 없는 아빠'가 아니었나 싶다. 모두에게 고마울 뿐이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무너지는 교회를 보면서도 나서지 못해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너져 가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것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결국은 원칙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주신 목회의 원칙을 자기 안에 확립하지 않으면, 급류 속에서 일을 놓치고 힘을 잃어버리죠. 내가 목회할 공간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이 격랑에 그냥 쓸려 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 피나는 자아 성찰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한 부단한 결단이 시시각각 필요합니다. 자기 삶의 원리가 없으면 부평초처럼 떠내려갑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를 두고 서 있어야 합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날 새벽, 평신도로 평생 목회자를 섬긴 아버지께서는 저를 찾아와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는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하라는 거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라는 거였습니다.
당신이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목사들은 잘못했다는 말을 못 하더라는 겁니다. 마치 잘못이 없는 것처럼 사는데 너는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접을 받는 게 익숙해져서 '감사하다'는 말을 못 하던데, 늘 감사하는 목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 말씀에 제가 한마디를 덧붙이겠습니다.
목사들이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요즘 신앙은 '예수 믿으면 천당을 간다'는 이런 단순하고 원시적인 믿음 때문에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것밖에 못 믿는다고 그랬어요.
제가 볼 때 목사들이 천국을 갈 생각을 안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떻게 천국이 있는데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목사들이 예수도 안 믿고 천국도 안 믿는 시대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야 실수를 해도 주님께서 다시 회복할 힘을 주십니다.
☞홍정길 목사
고(故) 옥한흠 (사랑의교회)·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2010년 은퇴한 이동원(지구촌교회) 목사와 함께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린다. 숭실대 를 나와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일하다 총신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밀알학교와 자활상점 굿윌스토어, 직업훈련센터와 그룹홈 등 자폐·지적장애인 교육과 자립기반 마련에 힘썼다. 남북나눔운동 등을 통한 북한 기아 돕기에도 헌신했다. 남서울교회(1976년)와 '건물 없는 교회' 원조 격인 남서울은혜교회(1995년) 등 23개 교회를 개척했으며, 한국해외선교회(GMF), 코스타(KOSTA) 등 선교단체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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