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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진리를 소개합니다

대림절(대강절, 장림절)의 의미

by 서귀포강변교회 2013. 11. 30.

 

 

대림절(Advent)의 의미는? 
                                                                                          문성모 목사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기독교를 기다림의 종교라고 말한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대림절은 성탄일 전 4주간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대림절은 대강절이라고도 하며, 예전에는 장림절(將臨節)이라고도 하였다.
대림절이 오늘날과 같이 4주간으로 지켜진 유래는 멀리 7세기 초의 그레고리 1세 교황 때부터이다.

 대림절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4세기 후반의 성 힐라리우스(St. Hilarius)가 쓴 Liber officium(성무서)인데,

 이 책에는 대림절을 ‘재의 시기’라고 하여 재를 쓰고 금식하며 속죄하는 절기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부활절 전의 사순절의 풍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림절을 전례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때는 5세기 중엽

이탈리아 동북부 아드리아 해변의 도시 라벤나(Ravenna)에서 부터이다.

그 후 6세기에는 로마에서도 지켜졌고, 12세기경에 와서는 공식적인 전례의식으로 확정되었다.
대림절의 시기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4세기의 갈리아 지방에서는 사순절처럼 40일간 지켜진 때도 있었는데,

지금도 밀라노에서는 6주간의 대림절기를 고수하고 있다.

대림절 기간이 4주간으로 정착된 것은 12세기경이며, 이때부터 대림절은 교회력의 시작으로 간주되었다.
대림절은 엄숙하고 경건한 절기로 출발하였다.

교인들은 금식하고 지냈으며, 성직자들은 자색 옷을 입고 예배를 집례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기쁨을 노래하는 대영광송이나 알렐루야 등을 부르지 않았다.
지금도 기독교 국가인 유럽에서는 대림절로부터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어떤 요란한 행사도 하지 않으며 침묵과 경건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대림절에는 이사야서 같은 예언서나 세례요한의 회개를 외치는 말씀이 낭독되었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의미와 함께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림절부터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행사와 요란한 이벤트들로 넘쳐난다.

성탄 칸타타가 연주되고, 각 교회학교의 발표회도 열린다. 심지어는 총동원 전도주일을 겸하는 교회도 있다.

친목회, 망년회, 위로회 등의 친교모임이 교회 안팎에서 왁자지껄하다.

침묵과 경건, 회개와 금식, 자숙과 반성의 풍조가 없는 대림절과 성탄절의 분위기가 유감스러울 뿐이다.

한국교회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눅2:25-35절) / 104.167장

1. 서론
오늘부터 ‘대강절(대림절/강림절)’ 절기가 시작이 된다.
‘대강절’이라는 말은 ‘기다릴 대(待)’자와 ‘내릴 강(降(강)자를 써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이다.
‘대강절’을 다른 말로 ‘대림절’이라 혹은 ‘강림절’이라고도 부른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때가 언제인가? 바로 ‘성탄절’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준으로 해서 4주전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대강절 절기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이 대강절 절기를 지키는 중요한 의미는 ‘장차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의미’가 이 대강절의 의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이제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대강절 절기를 맞이하면서 먼저는 2000년에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대강절절기를 지키시고, 그리고 또 이 대강절 절기 동안에 장차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 본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 당시에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며 소망했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안나’라는 사람이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 두 사람만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다.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생활을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그분이 오시면 로마의 지배에서도 벗어나고,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실 당시 거의 모든 백성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신앙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사람들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메시야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허락해주셨기 때문이다.

해서 오늘은 이들 두 사람이 어떤 신앙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이들의 신앙처럼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1) 먼저 ‘시므온’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말씀 25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충실하게 잘 지키며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려고 힘쓰는 사람이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은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고난 당하고 고통 당하는 그 백성들을 위로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위로 해주실 분은 누구냐? 바로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은 바로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말이다.

정리하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신앙으로 살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므온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늘 함께 계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므온은 메시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율법의 전례를 지키기 위해서 성전에 오는 예수님의 부모님들과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마 성전 안에는 시므온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특별히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메시야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시므온에게 메시야를 만나는 영광을 주셨느냐?
그것은 바로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한 신앙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정과 부패가 많아도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신앙으로 사시고, 그리고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 또 한 사람 오늘 말씀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으로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은 바로 ‘안나’라는 여 선지자이다.

오늘 말씀 36절과 37절에 보면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하였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안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첫째 안나는 ‘여 선지자’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여자 선지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던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 ‘안나’라는 사람이 여 선지자라는 말은 이 안나라는 사람이 당시에 보기드문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안나’는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시집을 가서 7년 만에 남편이 죽고, 과부로 산지가 벌써 84년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지금 나이가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혼자서 살았다는 말이다.

이 말씀 속에서 이 안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평생을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안나는 그런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나하고 어떻게 살았다고 하였느냐?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 안나라는 사람은 평생을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마침 성전에서 메시야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영광을 얻게된 것이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안나와 같은 신앙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안나와 같이 늘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고,

 늘 기도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안나에게서 배워야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38절 말씀에 보면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하였다.

안나는 메시야 예수님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자기처럼 메시야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에수님을 증거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곧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 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만, 우리가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도 중요하고, 예수님의 오심을 축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에수님이 누구신지,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증거 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 동안에는 우리 모두가 안나와 같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3. 결론
오늘 시므온과 안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들 중 한 사람은 할아버지고 한 사 람은 할머니이다.
이들의 가문이나 신부은 많이 다릅니다만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바로 이들은 둘 다 경건한 신앙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둘 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님을 맞이하는 영광을 얻게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일천 만이 넘는 성도들이 살고 있다.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와서 예배를 드리며 대강절 절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경건한 신앙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 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아마 그렇게 많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고 기다리기 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는 성도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 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믿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번 대강절 절기 동안에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다시 세상에 오실 예수 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기간동안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더욱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서 기도하면서 경건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린다.

 

 

자지말고 깨어 근신하라(살전5:1-11절) / 95.168장

1. 서론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이다.
지난주에 '대강절'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대강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말씀을 드렸다.

먼저는 2000년 전에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강절이고, 그리고 또 하나 대강절 절기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님, 그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경건한 신앙으로 준비하는 절기가 바로 대강절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이 대강절 절기에 가장 많이 듣게되는 말씀이 뭐냐?  바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말씀드린 설교의 내용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만, 사실 다른 설교와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은 그렇게 현실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와 닿는 설교의 내용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말이 단순히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바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날'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듣기는 들어도 '설마 이 세상의 마지막날이 그렇게 빨리 쉽게 오겠느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재림에 대한 설교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그렇게 현실적으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12:40절 말씀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주님이 오시는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주님은 반드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우리가 전혀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 앞에서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도록 늘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1) 오늘 말씀 1절과 2절에 보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보면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이라고 하였다.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하는 말씀이다.

이 문제는 예수님 승천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재림의 시기를 두고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은 이미 사도 바울로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들어서 자세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은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은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계시를 해 주시지 않았다.

그러면 재림의 때와 시기는 누구만 아시느냐?

마태복음 24:36절 말씀과 마가복음 13:32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였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절 말씀에 보면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하였다.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바가 아니라는 말이다.

알아야할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처럼 재림의 때와 시기는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재림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않은 때에 홀연히 순식간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① 먼저 바울은 주님의 오심은 마치 '밤중에 도적이 들듯이 그렇게 오신다'고 하였다.
오늘 말씀 2절에 보면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하였다.

도적이 올 때에 '내가 언제 가겠다'고 예고하고 오느냐? 그렇지 않지 않는가?
주님의 오심도 그와 같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예상치 않은 때에 오신다는 말이다.

② 또 하나 바울은 '해산하는 여인'을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였다.
3절 말씀에 보면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이 되어서 임신한 여인들이 언제 분만을 하게 될지 예정일이 다 나와 있고, 그리고 이제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예전에는 미리 예상치 못하였고, 그리고 아이를 낳을 때에도 거의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았다. 그 시절의 예를 든 것이다.

그러므로 '저희가 평안하고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온다'는 말씀은,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을 그때에 갑자기 주님이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비유에서 주시는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오심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임신한 여인에게 있어서 해산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해산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서 나는 아기 안 낳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마치 사람이 세상에서 좀 더 오래 살고 싶고, 죽고 싶지 않다고 해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사건인 것처럼, 주님의 재림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재림을 원치 않아도 주님의 재림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말 이다.

그리고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지 않고, 설마 주님이 오시겠느냐?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날이 멸망의 날이 될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의 날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도 그날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일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재림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4절과 5절 말씀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였다.

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할 수 없느냐?
그 이유는 우리는 어두움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두움이나 밤에 속한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어두움이나 밤'은 '영적인 무지와 불신앙'의 상태를 뜻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믿는 성도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바로 어두움과 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예전에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다 어두움 가운데 속하여 있던 자들이었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영적으로 무지했고, 죄 가운데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빛 되신 하나님을 알고,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되면서 빛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에베소서 5:8절 말씀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자가 아니라, 밤에 속한 자가 아니라 이제는 빛의 아들들이요 낮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믿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의 재림이 우리에게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 성도들이 믿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한다.

주님의 재림이 도적같이 이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주님은 재림은 분명히 말씀하신대로 도적같이 오시는데 -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미리 들었고 경고를 받아서 주님의 재림을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주님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주님의 재림이 더 이상 두려움의 날이요 멸망과 심판의 날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 성도들이 분명히 믿으시고 마음에 위로와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3) 그러면 마지막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6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하였다.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말고 깨어 근신하라'고 하였다.
사람이 잠을 자게 되면 감각도 없어지고 활동도 하지 않게 된다. 위험이 닥쳐도 깨닫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가 된다.

영적으로 잠을 자는 사람도 이와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잔다'는 말은 영적으로는 무감각하게 되고, 영적으로 무디어 지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죄가 얼마나 두려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마나 두려운 줄도 모르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위기의식이 없다.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위기의식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도적같이 임하게 되고, 이와 같은 사람들 에게 주님의 재림은 심판의 날이요 멸망의 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야 하느냐?
'오직 깨어 근신하라'고 하였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잠을 자지 말고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누가복음 21:36절 말씀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였다.
골로새서 4:2절 말씀에 보면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 였다.

이 말씀에서 보면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영적으로 깨어서 늘 기도생활에 힘쓰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영적으로 깨어 기도생활에 힘쓰는 성도들이 환난을 피하고, 그리고 언제 주님이 재림하셔도 부끄럽지 않게 주님 앞에 서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신앙이 영적인 게으름과 나태에 빠지지 않도록, 자지말고, 영적으로 깨어 늘 기도 생활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3. 결론
오늘 말씀 9절에서 1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와 같은 뜻을 깨달아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믿음으로 사시고, 그리고 장차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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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 공동기도문

 

진리의 주님 우리에게 오소서.

거짓과 가식, 위선과 자만을 멀리하고

진실함과 의로움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오소서.

무관심과 미움, 다툼과 시기를 물리치고

따뜻함과 온유함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평화의 주님 우리에게 오소서.

욕망과 폭력, 독점과 전쟁을 멸하시고

나눔과 사랑, 섬김의 화평이 가득하게 하소서.

 

생명의 주님 우리에게 오소서.

오염과 파괴, 무절제와 무분별함의 어리석음을 없애시고

함께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마음 가득하게 하소서.

 

우리의 참 길이 되신 주님 우리에게 오소서.

갈길, 가지 말아야 할길 분별하게 하시고

길되신 주님따라 주의 선함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날마다 다가오는 기적 같은 삶의 은총들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주시고 

주신 삶, 넉넉히 누리며 감사하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를 유혹하는

죄와 시험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오직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승리하게 하시고 자유하게 하시며

생명 가득 사랑 충만하도록 인도하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대강절기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문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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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所望)합니다   

대림제1주일-2013. 12. 01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교회력으로 오늘이 새해 첫날 원단(元旦)이다.
새해가 오면 누구나 새로운 소망을 정하고 새롭게 새해를 출발한다.
소망(所望)도 세월이 흐르면 소멸되어 소망(消亡)이 되어 버리지만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깨어 기도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오늘 책<장영희의 수필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을 읽다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 새해 소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소망’을 묵상하며 여기에 나의 소망도 잠재해 있었음을 발견하고
또 새롭게 지녀야 할 소망이 있음에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쳐야 할 기도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망(所望)  
    Henri Nouwen. 1932-1996)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다른 이가 내게 주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의 척도가 되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내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내 스스로 그런 한계를 만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