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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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가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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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치 : 서아시아
2. 인접국 : 요르단, 지중해,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3. 면 적 : 21,501 평방 Km (남한의 4.5분의 1)
4. 인 구 : 약 426만 명
5. 수 도 : 예루살렘
6. 언 어 : 히브리어 (영어)
7. 종 교 : 유대교, 회교, 기독교, 드루즈파
8. 통 화 : 세겔, 1 세겔 = 100 아골라
9. 기 후 : 지중해성 기후, 우기 : 11월 ~ 3월
10. 전 압 : 220 V
11. 공 항 : 벤구리온(텔아비브)- 예루살렘에서 약 60 Km
12. 음 식 :
정통 유대인들은 코셔밀 이라고 하여 돼지고기와 조개류를 사용 하지 않고 소고기 와 우유, 버터, 크림, 치즈 등을 같이 먹지 않는다. (레 1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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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별 기 온 |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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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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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저 기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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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고 기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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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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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강우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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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
0 |
0 |
0 |
1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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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국가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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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적 : 1,102,000 ㎢
2. 인구 : 5,500 만명
3. 수도 : 카이로
4. 종교 : 이슬람(90%), 기독교(10%)
5. 언어 : 아랍어, 영어, 불어
6. 통화 : 이집트 파운드 (£E)
7. 전압 : 220 V
- 8. 기후 :
카이로를 비롯한 내륙이 아열대 지중해 연안이 지중해성 기후 이다. 이집트 상형문자에는 '비'를 뜻하는 말이 아예 없을 정도로 건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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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별 기 온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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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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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저 기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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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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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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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최 고 기 온 |
17 |
17 |
18 |
22 |
30 |
32 |
33 |
33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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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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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강우일 |
1 |
1 |
1 |
0 |
0 |
0 |
0 |
0 |
0 |
0 |
1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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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국가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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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 적 : 91,869 ㎢
2. 인 구 : 약 500 만명 / 암만-160만명
3. 수 도 : 암만
4. 종 교 : 이슬람(국교)
5. 언 어 : 아랍어 / 영어, 불어도 통용
6. 통 화 : 요르단 디나르
7. 전 압 : 220 V
- 8. 기 후 :
건조하고 더우며, 겨울은 가끔 눈이 내릴 정도로춥다. 건기(5-10월)와 우기(11-4월)로 분명히 구별되며, 우기에는 집중 적인 강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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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별 기 온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평 균 기 온 |
8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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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25 |
26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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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아 다메섹 팔미라 크락 데 슈발리에 시리아 약사 시리아의 성서적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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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국가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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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치 : 지중해 동부
2. 면 적 : 18만5180㎢(남한의 약 2배)
3. 인 구 : 1630 만명
4. 수 도 : 다마스쿠스
5. 언 어 : 아랍어
6. 종 교 : 이슬람교 90%, 기독교 10%
7. 통 화 : 시리아파운드
8. 기 후 : 지중해성(해안지역) 및 사막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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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별 기 온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평 균 기 온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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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26 |
26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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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 요 시리아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기독교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나라다. 발길 닫는 곳마다 고대 기독교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이 성지 순례를 위해 시리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약성서 신명기에는 이스라엘의 조상을 ‘유리(遊離)하는 아람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람은 바로 시리아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이 신앙적인 회개를 한 곳도 바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성서상의 ‘다메섹’)이다. 다마스쿠스에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곳이라고 알려진 장소도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로 한시간 쯤 거리에 있는 마룰라 지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고대 아람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은 물론 언어학자와 성서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다. 고대 아람어는 예수가 생존했을 당시 사용되던 언어다.
다마스쿠스에서 북쪽으로 약 350㎞ 떨어진 알레포는 구약성서 사본 가운데 하나인 ‘벤 아셔’ 사본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다마스쿠스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인 알레포는 로마제국 시대 이후 중동지역의 상업중심지로 각광을 받아왔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향할 때 거쳐갔다는 팔미라도 빼놓을 수 없는 기독교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곳에 남아있는 유적은 대부분 1∼3세기 로마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
바알벡 시돈 두로 백향목 베이루트 트리폴리 비블로스 지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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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국가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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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적 : 10,452 ㎢
2. 인구 : 370 만명
3. 수도 : 베이루트
4. 종교 : 기독교, 기독교
5. 언어 : 아랍어, 영어, 불어
6. 통화 : 리라
7. 전압 : 220 V
- 8. 기후 :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중 약 300일간 맑은 날씨를 보인다. 겨울에도 해안지역은 따뜻하고, 산간지역에만 눈이 내린다. 여름에는 해안지역은 덥고, 산간지역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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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별 기 온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해 안 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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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내 룩 지 역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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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24 |
25 |
23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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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9. 역사
레바논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20만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2500년경, 페니키아(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지방에 있던 고대 왕국)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랍의 조상인 가나안 민족의 일파(一派)인 페니키아인들은 중동 지방의 해안 배후 지역과 지중해 연안 국가들 사이의 국제 무역에 종사하였던 상인들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또한, 화폐와 문자, 새로운 발명품들과 그 밖의 새로운 문명들을 전하는 문화의 전달자들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더 큰 왕국을 건설하는 대신, 도시국가로 남아 주변의 강대국들과 타협하면서 평화와 자유 무역을 보장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북아프리카 튀니지아 부근에 있던 고대 도시국가. 기원전 146년 로마군에 의해 멸망되었다.)와 유럽의 마르세이유 같은, 다른 성대한 치외법권적 도시국가들을건설하였다.
레바논은 1516년부터 1918년까지 오토만 제국의 통치하에 정치적, 행정적인 지배를 받았다. 1920년, 현재의 국경으로 경계 지어지는 영토가 레반트(동부 지중해와 그 섬의 연안 제국들)내 프랑스 군대의 지휘자였던 구로 장군(General Gourau)의 포고(布告)에 의해 그랑 리방(Grand-Liban: 대레바논)이라 불리는 국가가 되었다. 1926년 5월 23일, 의회제도를 갖춘 민주 공화국 헌법이 채택되었다. 공화국의 실제적인 정치적 독립은 1943년 11월 22일(독립 기념일)에 이루어졌다. 1945년, 아랍국가연맹(League of Arab States)과 유엔(United Nations)의 창단에 참여하였고, 1946년 12월 31일, 레바논에 주둔해 있던 외국 군대가 공화국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후 30년 동안, 레바논은 다양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커다란 변혁을 이루었다. 주변국들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이웃 국가들로부터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고, 결국 숙련된 노동자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대거(大擧) 레바논으로 몰려 들었다. 공화국의 경제력은 주로 기업인들에게 집중되어 왔으며, 민주주의 전통과 언론 및 표현의 자유, 그리고 높은 교육 수준으로 말미암아, 레바논 공화국은 곧 중동 지역에서 문화와 학문, 그리고 의학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주로, 이스라엘의 아랍국 점령과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공격-이 결합되어 1975년, 결국 내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중동 지역의 불안한 정세는 레바논의 정치와 경제 상황에 동요를 초래하였다.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일어났고, 1978년과 1982년 두 번에 걸친 이스라엘군의 침공으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내전 기간 중 정부의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실질적인 경제 기반인 기간 시설들이 유실되었으며, 숙련된 노동자들이 대거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89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체결된 타이프 화해 협정(Taif Agreement)의 결과로, 군대의 전쟁 행위는 1990년 10월에 실제적으로 끝이 났다. 당시 엘리아스 흐라위(Elias Hrawi)가 대통령직을 맡았고, 수상직은 살림 알 호스 박사(Dr. Salim Al Hoss)가 맡았다. 1992년에는 라휘크 하리리(Rafik Hariri)가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20년만에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1995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흐라위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연장되었다.
1998년 10월, 에밀 라후드 장군(His Excellency General Emile Lahoud)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살림 알 호스 박사는 다시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라후드 대통령은 의장인 나비흐베리(His Excellency Mr. Nabih Berri)가 주관하는 국회에서의 취임 연설에서 탁월한 치안 유지, 정부 기구의 강화, 투명하고 책임있는 공무 수행의 당위성(當爲性)과 사회 정의와 평등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2000년 10월, 라피크 하리리(His Excellency Mr. Rafik Hariri)가 수상으로 재임명되었다.
2000년 5월 25일, 레바논의 지속적인 저항이 성공을 거두어, 22년간 국제 사회의 요구와 유엔의 결정에 불복하며 레바논의 영토를 점거하여 온 이스라엘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레바논 땅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철수와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들은 아직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고 있는, '셰바 농장'으로 알려진 인접 마을들에 관한 문제, 국경 설정에 관한 문제, 계속되는 이스라엘군 침투에 관한 문제, 이스라엘에 아직까지 불법 수감되어 있는 레바논 국민들에 관한 문제 등). |
이스탄불 칠대교회 갑바도기아 안디옥 노아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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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국가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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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 명 : 터어키 공화국 (REPUBLIC OF TURKEY)
2. 위 치 : 북위 36 - 42 도, 동경 26 - 45 도
3. 면 적 : 약 78만 평방 Km (한반도의 3.5배)
4. 인 구 : 약 6,000만 명
5. 민 족 : 터어키족(90%), 쿠르드족(7%)
6. 종 교 : 인구의 약 99%가 회교 (수니파)
7. 언 어 : 인구의 약 90%는 TURK어를 사용
8. 수 도 : 앙카라 (ANKARA)
9. 기 후 : 해양성 기후(해안지방), 대륙성 기후(대륙지방) 터어키의 기후는 보편적으로 한국의 기후와 유사하나 국토가 넓고 지형이 복잡하여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이스탄불, 이즈미르와 같은 해안지역은 해양성 기후로 여름에는 그다지 덥지 않고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으나 동부 내륙지방은 대륙성 기후로서 여름에는 40도 C 까지 올라가며 겨울에는 영하 40도 C 까지 내려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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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별 기 온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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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저 기 온 |
3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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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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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2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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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고 기 온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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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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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25 |
25 |
22 |
18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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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강우일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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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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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3 |
3 |
5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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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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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의 역사개관 성경의땅 요르단 성지의 도로 요르단의 성지 아라비아의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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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국가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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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 적 : 132,561 ㎢
2. 인 구 : 900 만명
3. 수 도 : 아테네
4. 종 교 : 그리스 정교(96%)
5. 언 어 : 그리스어, 영어
6. 통 화 : 드라크마
7. 전 압 : 220 V
- 8. 기 후 :
지중해성 기후로서 4-10월은 비교적 지내기괜찮으나, 여름은 상당히 덥고, 겨울은 의외로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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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별 기 온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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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12월 |
최 저 기 온 |
6 |
6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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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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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고 기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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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20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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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32 |
28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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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평균강우일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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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9 |
7 |
4 |
3 |
3 |
4 |
9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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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요 역사와 신화의 나라", 그리이스는 유럽 남동단에 위치하여 유럽 본토와 에게해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 산이 많은 지형이긴 하지만 코발트 색 바다에 밝은 태양이 눈부셔서, 그리이스 다운 풍광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본토의 아테네는 물론이려니와 무수한 섬, 각처에 고대 그리이스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실로 서구 문명의 발상지 다운 낭만의 향기를 풍기며, 남겨진 유적도 신화의 세계를 방불케 한다.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 호메로스의 서사시, 도시국가의 성립과 페르시아 인의 침입, 헬레니즘 시대, 비잔틴 제국, 독립전쟁 등 파란만장한 그리이스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유럽 제국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B.C. 1000년 이래의 고대 문명의 유적은 아테네는 말 할 것도 없고 나라 전체가 사적의 보고로 그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시내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인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인의 집합 장소 였던 아고라, 제우스 신전, 경기장, 그리고 세계적인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나 미술관, 극장 등이 산재해 있고, 교외에도 다프너의 수도원, 에레프시스의 데미테르 신전 자리, 수니온의 포세이돈 신전 등이 있다.
또한 피라미드의 성채가 있는 나우프리온이나 에피타울로스의 유적,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올림피아, 아테네와 경쟁한 스파르타, 그밖에 '세계의 중심'이라던 델피-그리이스 역사의 깊이에 누구나 감동을 받는다.
그리이스 본토, 소아시아, 그리고 크레타 섬에 둘러 쌓여 에게해에는 고대 유적만이 아니라 자연을 만끽 할 수 있는 섬들이 무수히 떠있다. 니케아 문명이 꽃피었던 크레타 섬을 비롯하여 잊혀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전설이 담긴 산트리니 섬, '에게해의 장미'라는 로도스 섬, 미코노스 섬, 데로스 섬 등 에게 해에 비치는 흰 집들이 서있는 시적인 풍경은 그리이스 다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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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 바울의 로마선교 퀴바디스 베네딕스 베드로 대성전 바울 대성전
카타콤바의 어원
카타콤바라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동굴도 거의 다 무덤으로 차 버리자, 그때부터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네크로폴리' 즉 죽은 자들의 장소라고 불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무덤을 '체메테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잠자고 있는 중 또는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 체메테리움(현재는 이탈리아어로 치미테로라고 부름)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지어 낸 말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이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네크로폴리'라고 불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은 313년이다. 그 후 교황 성다마수스(366-384)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고, 이곳을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 후 중세기 때부터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 공동묘지(주로 1세기에서 4세기 초까지) 전체에 대해 일반적으로 카타콤바라고 널리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내려온다.
카타콤바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
네로 시대의 박해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첫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주로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보금자리와 휴식처는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밖엔 없었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절을 행할 수 있었던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1세기-3세기
로마에서 순교한 사도 베드로는 바티칸 골짜기에, 사도 바울은 오스티아로 가는 길 주위에 있던 이교도들의 무덤 사이에 묻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두 사도가 순교했던 1세기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용 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의 대상이 주로 경제력이 없던 가난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묘지와 같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을 마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세기에 들어오면서 선교의 대상이 중류 또는 상류 계층까지 확대되면서, 차츰 그들의 소유하고 있던 로마 근교의 별장, 과수원, 또는 농장을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희사함으로써 비로소 공동체 전용 묘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당시의 공동체는 희사 받은 땅 위에 무덤을 세울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카타콤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3세기는 순교가 가장 많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황제는 카라칼라와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 발레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공동 묘지를 색출하여,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313년에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이제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공적인 재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땅 위에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지하에 묻혀 있던 성인과 순교자들 무덤 옆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묻히기 위해 계속 그들의 무덤을 지하에 만들었으며, 이러한 일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5세기-9세기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는 313년부터 시작된 카타콤바 성지 순례는 거의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현재 발견된 카타콤바에 가 보면, 그 당시 성지 순례를 하던 신자들이 성인이나 순교자의 무덤이 있던 벽 위에 새긴, 그분들의 전구를 빌었던 기도문 등이 남아 있다.
반면에 네 차례에 걸쳐 로마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곳 지하 무덤도 예외 없이 그들로부터 약탈을 당하였다. 옛 로마인들의 장례 풍습은 사람이 죽게 되면 평소에 지녔던 모든 금붙이 또는 패물 등을 그대로 관속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무덤은 로마에 침입한 이민족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 보더라도 관 뚜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 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바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바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이때부터 카타콤바는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19세기-현재
보시오 이후 약 2백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예수회 신부이자 고고학자였던 주세페 마르키(1795-1860)가 카타콤바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를 듣던 제자들 중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1822-1894)는 마르키 신부의 수업 중에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로마에 남겨 놓은 교회 유적'이란 제목의 강의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 감동이 거의 천 년 이상 역사에 묻혀있던 카타콤바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데 로시가 없었더라면 카타콤바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젊은 고고학도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던 대상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숨어들었던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에 관한 것이었다. 어렵고도 끈질긴 인내를 요구하는 이 작업은, 1854년 로마의 남쪽 성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들판의 땅 밑에서, 3세기 때의 교황 무덤과 체칠리아 성녀의 무덤을 발견함으로써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카타콤바의 존재를 그 중요성과 함께 세상에 드러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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