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무대에 나서는 태극전사들 중 누가 기도 세리머니를 하게 될까?
장미란의 부모는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기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최근 집과 가까운 세계로교회로 옮겼다. 가족과 함께 서울 대흥동 염리교회를 20년 넘게 섬겨온 양태영은 4년 전 아테네올림픽에서 불공정한 채점으로 금메달을 놓친 아픔을 하나님의 담금질로 여기고 밤낮으로 무릎을 꿇어왔다.
또 남녀 핸드볼과 하키, 남자 축구와 야구, 여자 농구 등 단체경기에 출전하는 기독 선수들은 성적에 관계없이 경기 때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축구의 박주영과 김동진 선수 등은 골을 통해 중국 하늘에 하나님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올림픽에 기억나는 인물
에릭 리들
- 1924년 파리 올림픽 400미터 경주에서 우승 테이프를 끊는 에릭의 모습 -
- 중국에서 선교 활동 당시 에릭의 모습 -
에릭 리들은 1902년 중국 천진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선교사의 자제로서 먼 거리를 걷고 달리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육상 재능을 보이면서 스코틀랜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한 뒤 본격적인 육상선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당시 수년간에 걸쳐 스코틀랜드는 물론이거니와 전 영국 단거리 육상대회를 모조리 휩쓸었으며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럭비팀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에릭 리들은 영국대표로서 1924년 제 8회 파리 올림픽 경기의 금매달 후보였다. 그러나 100 m 경기 일정이 발표되었는데 첫 예선일자가 7월 6일 주일 오후 3시와 5시였다.
그는 그 일정표를 보자마자 "저는 주일에는 안뜁니다." 라고 단호한 결정을 알렸다. 그의 그런 결정은 그의 주일 성수를 위한 자기 희생적 결정이었으며 주일은 주님의 날이므로 주님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신앙의 표현이었다. 에릭 리들의 100 m 출전 포기를 들은 영국 전체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를 가리켜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신앙을 소매 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심 깊은척 하는 위선자",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 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에릭 리들은 100 m 예선 경기를 하던 7월 6일 주일에는 스콧츠 커크(Scats kirk) 장로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였다. 그 날 에릭 리들은 경기장에 나가 동료 선수들을 격려하는 일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주일을 교회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다.
100m 경기에서는 영국의 헤롤드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기록은 에릭 리들보다 약간 뒤졌었다. 에릭 리들은 기쁜 마음으로 헤롤드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다. 하나님은 에릭 리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에릭 리들은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200 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 m 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400 m 에서는 다른 선수들의 들러리였다. 예선에서만도 스위스의 '임바흐', 미국의 '피치' 같은선수들은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후보로 각광을 받았었다.
드디어 결승의 날이 왔다. 에릭 리들은 신들린 사람처럼 첫 코너를 돌았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고 불안함을 표현하였다.
에릭 리들은 임바흐, 피치 등 우승후보를 제치고 47초 6이라는 세계신기록까지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 담당 안마사가 쥐어준 쪽지가 응답되었던 것이다.
<구약 삼상2:4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
그는 처음 400 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처음 200 m 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 m 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은 자기를 위한 날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설교한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올림픽 경기로 국가적 영웅이 되었지만, 에릭 리들은 하나님과의 헌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영광을 버리고 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갔다. 그 이듬해 그는 영웅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내던진 채 그는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운동선수의 화려한 명성이 중국의 무지한 농부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 비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리들은 처음 12년 간 톈진에서 교사로 봉사하며 아이들에게 스포츠를 통한 복음을 전했고, 1932년에는 목사로 안수를 받고 플로렌스 맥킨지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2차대전중인1941년 중국내부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영국정부는 중국내 영국민들을 대피시키도록 하였고 에릭은 아내와 아이들을 캐나다의 처가로 보냈지만 그 자신은 산둥 반도의 소창이라는 곳의 남아 선교본부를 중심으로 곳곳을 다니며 농촌 지역에서 전도하며 또한 어려움에 처해있던 중국인 지역민들을 도왔다.
그러던 중 소창이 일본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수 년 간 1,800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본군 치하 웨이시엔의 수용소에 갇혀 지내며 식량과 의료지원을 도왔다. 그는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유머를 잊지 않고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감싸며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활동은 수용소 생존자의 증언에 의해 전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945년 종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과로와 영양실조에 의한 뇌종양에 걸려 세상을 떠나 현재 중국 웅방시의 작은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그의 부음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크게 애도했으며 다시 한 번 그들의 영웅을 기억하고 칭송하였다. 2005년에는 수용소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었으며 그의 모교인 에덴버그대학에서도 그를 기리는 기념물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쓴 러셀 렘지의 말처럼 과연 그의 삶의 목적은 운동경기의 우승이 목표가 아니라,'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는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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