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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스크랩] 무엇으로 충만할 것인가? (엡 3:14-21)

by 서귀포강변교회 2009. 2. 5.

무엇으로 충만할 것인가? (엡 3:14-21)

이 시간에 “무엇으로 충만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항상 사모하고 엎드려 구해야 할 것은 은혜로 충만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사도 바울은 자기 뿐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충만[充滿]이란 가득하게 참을 의미하는 명사입니다. 우리 삶에 은혜로 가득히 넘쳐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눅6:38 말씀처럼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우리에게 안겨 주고 싶으신 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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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부요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솔로몬 욥 여호사밧 히스기아 등등 다 부자입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의 부요를 통해서 영적 부요를 예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믿음의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적 부요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그래야 바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조그만 빈 공간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우리 원수 사탄의 차지가 됩니다. 

그럼 무엇으로 충만해야 할까요?

1.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본문의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축복 속에서 우리가 누릴 충만함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6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이 능력으로 강건함은 성령 충만을 가리킵니다. 성령 충만해야 만이 우리 영혼이 강해지고 신자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최대의 욕은 “성령 받지 않고 목사 되라”는 욕이라고 합니다. 이 욕이 얼마나 큰 욕인지 저는 목회자로서 경험해 보아서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거짓선지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 받지 않으면 아무리 잘하려 해도 가증한 외식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경건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고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 교만 중에 가장 무서운 교만은 기도하지 않는 교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는 것이 교만일까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엡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했습니다. 술 취하는 사람들은 매일 취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매일같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사람이 살고 강건해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세상을 이기고 시험을 이깁니다.

2.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17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왜 믿음이라 했는데 말씀 충만인가?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으세요.

롬10:8-9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즉 예수님을 영접함도 복음의 말씀을 믿을 때입니다.

천국에 가서만이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함께 하신 주님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면 주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항상 함께 하시리라 하셨으니 그렇게 믿으세요. 함께 계시니까 함께 계신 것처럼 사세요.

태교에 있어서 태아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태아발달에 좋다고 합니다. 태아와의 대화는 산모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할 수 있는데 태아와 대화하면 지능개발 행동발달이 빠르고 정서가 안정되고 사회성이 좋으며 엄마로서 자긍심을 갖게 되고 부부의 금슬도 좋아지며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교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아이가 대답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가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화를 나누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도 계속하여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처럼 시각으로 주님을 보지 못하고 감각으로 주님을 느끼지 못하지만 곁에 계심을 믿고 늘 믿고 의식하고 대화하고 영광 돌리고 조심하며 함께 계신 것처럼 살면 주님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눈을 감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연상하며 고요히 묵상해야 합니다. 이 묵상은 말씀이 육신이 되도록 사실을 사실로 인지시키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온갖 영광스런 은혜와 복을 묵상해야 합니다. “아멘 믿습니다. 나는 복 받은 자입니다. 나는 승리자입니다. 나는 새 사람입니다. 나는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나는 형통한 자입니다. 나는 건강한 자입니다.” 하면서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주님의 임재는 물론 그 믿는 대로 되는 기적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17절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렇습니까?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때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 충만입니까? 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엡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으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목표입니다. 하나님과 같을 순 없지만 그러한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을 알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며 날마다 눈물 흘리며 내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신앙이 온전한 최고봉의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히12:1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했습니다.

4.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20-21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넘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늘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고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만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만사가 내 믿음대로 된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보다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도의 설화입니다. 어느 날 쥐에게 한 기인이 물었습니다. “쥐야! 왜 떨지?” 쥐가 대답했습니다. “고양이가 무서워요.” 이 말을 듣고 하도 딱해서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떨자 “왜 계속 떠느냐?” “개가 무서워요.” 그래서 또 다시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떠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무서워요.”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겠다 싶어 호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제는 떨 이유가 없겠지요. 사람도 떠는 호랑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냥꾼이 무섭다고 떠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기인은 “아무리 도와줘도 안 되겠구나! 다시 쥐가 되어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하나님 자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수만 가지의 말씀으로 약속해 주셨으면 가령 호랑이가 되어야지 쥐가 되면 되겠습니까?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선 지식와 고정관념을 깨야합니다. 놀라운 복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거나 구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면 결코 놀라운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이 생겨나기를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슨 일을 어떻게 할까 날마다 고민하시면서 더 아름다운 생각을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가능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뇌가 얼마나 신기한지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위해서 온 몸이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으로 가득차면 성령께서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반응하셔서 위대한 결과를 나타내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충만을 위해서 몸소 결핍을 경험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충만하길 바라시는 것이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씀으로 충만하고, 사랑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이 되고 사랑 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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