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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레노바레(관상기도) 영성부흥성회를 검증합시다

by 서귀포강변교회 2009. 10. 9.

[사설] 혼란을 틈타 슬며시 고개 드는 ‘레노바레’


                                                                    바이블 파워

    한국 기독교계의 외형적 성장의 부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적 영성을 강조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동원 목사(지구촌 교회)와 이철신 목사(영락교회)를 공동대회장으로 한 ‘2007 영성부흥 레노바레국제컨퍼런스’가 그것이다. ‘묵상·성결·사회정의·카리스마·복음전도·성육신’의 6대 레노바레 영성을 통해 균형 잡힌 교회와 신앙인을 만들어보고자 개최하는 이번 컨퍼런스에는 레노바레운동의 원조인 리차드 포스터 등이 내한하고,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강준민 목사(동양선교교회), 최일도 목사(다일교회), 이윤재 목사(한신교회) 등이 주강사로 참여하여 그동안 교회 성장에만 귀를 기울여온 한국 교계가 갖춰야 할 내면의 영성을 소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레노바레운동의 창시인인 리차드 포스터는 흔히 복음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복음과는 무관한 퀘이커교도이다. 퀘이커교는 그것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가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고 진리(?)를 깨달으면서 시작된 신비주의 종교이다. 퀘이커교의 기본 교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씨앗,’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또는 ‘내면의 빛’이라고 부르는데, 세상 모든 죄인들 안에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반성경적인 뉴에이지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퀘이커교는 성경의 진리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이교도 신비주의로서, 그들 가운데는 교회도, 목사도, 집사도 없고, 가장 중요한 복음도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성경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 그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복음인데, 퀘이커교는 이 세상 모든 죄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마귀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퀘이커교도인 리차드 포스터는 ‘레노바레’라는 것을 만들어 기독교 내에 ‘관상기도’라는 신비주의 독소를 뿜어왔다. 성령이 성도 안에 내주하시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마귀와의 교제로 문을 여는 관상기도는 이동원 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한국 교계에 소개되었다가, 여러 반발에 부딪혀 그간 잠잠해 있었다.

그러나 아프간 피랍사태와 같은 혼란스런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고, 이에 교계 내부에서도 외적 성장 전략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때는 이 때다 싶은 듯 레노바레운동이 슬며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노바레운동은 한국 교계의 비정상적인 외형적 성장주의에 대한 바른 대안이 될 수 없다. 레노바레 자체도 많은 비성경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면의 영성 수련’이라는 미명하에 도입한다면 한국 교계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영적 혼란과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목사들이 바른 성경과 그것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이교도의 신비주의 운동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이 나라 기독교계가 지향해야 할 푯대를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경을 알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이가 과연 있는 것인가? 영적 분별력 없이 온갖 것을 다 수용하여 현실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치료약을 구하는 자가 약 성분을 읽을 줄 몰라서 독약을 골라든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2007년09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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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건 논설위원/서원대 교수 


가톨릭의 신비적 영성에 중독 된 한국교회

한국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위험


지성사적으로 보아, 미국의 히피 그룹을 위시해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 기성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반(反)문화운동이 잇달아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지난 196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세계적 수준에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대표한 거대 관료 조직으로서 가톨릭교회는 자연스럽게 안팎의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세계의 보편적 교회를 표방하는 가톨릭교회로서는 그 같은 비판적인 저항의 시대 조류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해 모종의 신학적 대타협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가톨릭교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3년간에 걸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 타종교에 대한 종전의 권위주의적, 배타적 태도를 바꾸어 종교 간에 대화를 앞장서서 추구하는 에큐메니즘(ecumenism, 초교파주의)의 선봉에 서는 등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쪽으로 일대 신학적 전환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교리)과 개신교회의 가르침 양자 사이에 종래 존재했던 뚜렷한 간격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흐려지게 됐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지난 18세기 말 조선에서 포교가 처음 시작된 이래 수많은 종교적 희생자 곧, 순교자를 내는 등 줄곧 강하게 이단시하고 금지했던 유교적 조상제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이제는 한국의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돌연 인정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보아, 지난 1세기에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초대 교회가 출현한 이후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중 3세기에 들어와서 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국교로 공인됐다. 그렇지만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그 주위에 있었던 이방 종교들의 주술적 요소를 상당 부분 수용한 전통이 오늘까지도 면면히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1960년대의 히피문화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을 배경으로 지난 1980년대에 출현한 ‘탈근대’, ‘다원주의’, ‘개인주의’, ‘감성’ 등으로 표상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흐름과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에 나타난 세계화와 정보화의 영향 아래 세계 종교들 중에서도 기독교 전반 특히 한국 개신교 내에서 약 10년 전부터 ‘제도 종교’와 구별되는 주관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크게 고조됐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특별히 끄는 측면은 바로 2006년 말 오늘에 이르러서는 본질적으로 다분히 주술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가톨릭 영성’이 16세기 말 당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등 각종 주술 타파를 목표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하는 보수적인 한국 개신교회에 마저도 조금씩 미묘하게 침투해 이제는 사실상 거의 지배하게 된 새롭고도 자못 흥미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종교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사회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평소에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복음주의 신앙은 마땅히 가톨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돼야 한다고 믿는 한 사람의 개신교 신자로서 최근에 한국 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이것의 위험을 제대로 밝히는 일이야말로 현재 침체 상태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의 이노베이션을 위해 여러모로 매우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 스타일의 영성’ 혹은 달리 말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영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영성은 많은 경우 이방 종교들로부터 차용된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의례적인 기도 혹은 지루한 되풀이 기도, 영창, 곧 시편 따위의 글귀를 단조롭게 읊는 일,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명상(meditation),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며 단순히 안식을 취하는 명상적 행위 등이다.


그래서 약 120년 전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래 현재까지도 미국의 문화적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 진영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미의 주요 신학교중 거의 가장 대표적 기관인 초교파적 풀러신학교의 ‘영성’ 코스 관련 주요 필독 도서 목록에는 물론 한국의 대표적 신학교들의 각종 ‘영성’ 과목의 경우도 저자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퍼스(Thomas A. Kempis) 등 로마 가톨릭 신자인 것을 새삼 주목할 수 있다.


한편, 금년 여름 한국을 잠시 방문해 연일 개최한 집회를 통해 국내의 수많은 성도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미국 남가주 소재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 이 릭 워렌 목사 역시 명상, 집중기도 및 여타 가톨릭의 이교도적 영성 형태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 저자들의 주장을 자신의 저작이나 설교에서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 예로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워렌 목사는 존 메인(John Main)을 인용하고 있는데, 메인은 베네딕트 수도사로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의 지도자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같은 우리들 속에 남아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워렌 목사는 북미 기독교계에서 현재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람으로서 최근 한국을 방문해 당시 국내 기독교계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주목을 받은 바도 있는 <영적 훈련과 성장>과 <기도>의 저자인 퀘이커 출신의 신비주의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강조하는 ‘명상’을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시대의 영성신학자를 대표하는 목사로 이미 잘 알려진 포스터가 창시한 이른바 ‘레노바레’(Renovare) 운동은 오늘날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 교회를 위시해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명상의 각종 테크닉에 바탕을 둔 레노바레 운동은 본래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퀘이커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진보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교파주의(ecumenism)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운동이다. 주지하듯이 교파 간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은 기본적으로 교리(doctrine)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로써, 필자는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종교적(가톨릭) 신비주의’와 ‘성서적 영성’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 내의 ‘신비주의의 발전’과 ‘성령운동의 번성’ 양자 사이에 매우 흥미 있는 관련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ism)과 카리스마 운동들은 놀랍게도 많은 측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속에서 발전한 신비주의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인 존 윔버(John Wimber) 같은 이가 그의 책 <파워 이반젤리즘(Power Evangelism)>에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를 아무런 문제없이 추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 진영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관점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카리스마적 부흥을 위한 예언자적 충동(자극)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경험, 비전(환상), 내적 목소리, 황홀감과 엑스터시, 진위가 의심스러운 예언하기, 모종의 힘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각종 방언 따위 같은 카리스마 운동과 오순절 성령운동의 주요한 표현들은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와 일치한다.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오순절 성령운동 및 카리스마운동 추종자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가톨릭신앙과 새로운 복음주의가 기묘하게도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될까?

‘교리’(doctrine, 신조)와 ‘헌신/신앙심’(devotion) 사이에는 종종 긴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올바른 교리는 자연적으로 올바른 헌신/신앙심을 갖다 준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개신교회는 차제에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감정주의’(religious emotionalism)를 ‘기독교 영성’과 잘못 동일시하는 오류를 더 이상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유명한 간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드라마틱한 중생 체험과는 뚜렷이 모순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일으킴으로써 기독교의 공신력이 크게 추락하는 일이 종종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구굿닷컴 이영주 기자의 2006년 12월 25일자 글 ‘드라마틱한 간증의 함정’ 참조). 이는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에 대한 강단의 가르침(설교)과 기독교계 언론의 수준 양자 모두가 아직 매우 낮은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잘 방증한다.


끝으로, 필자는 신비적 경험에 대한 우리 개신교 크리스천의 사고를 기본적으로 틀 지우는 데 중심이 될 수 있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가 나타나 있는 시편 131편과 천사숭배와 금욕주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는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이다. 

----------------------------------------------------------리차드 포스터, ‘신비주의’가 들통나다

한승용 편집장     

한국 교인들에게 <기도>(두란노)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신비주의 퀘이커교도” 리차드 포스터가 한국을 방문했다. 리차드의 이번 방한은 레노바레 코리아가 주선한 것으로,  S대학교 등에서 영성훈련세미나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차드 포스터는, 신문에 따르면, “어제 오늘 두세 명에 대해 관찰한 걸 나누고 싶다”며 단상 아래의 중년 남성을 세우고 “이분은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소개했고, 또 다른 남성에게는 “지혜의 영이 함께함을 느낀다”고 했으며, 다른 남성에게는 “삼손 같은 힘을 느낀다”고 말했다고 한다.


리차드는 마치 자신에게 특별한 영적 분별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이와 같은 ‘영웅적인’ 행위를 왜 한 것일까? 회중 앞에서 영적 거장(?)의 ‘영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그의 행위는 은사가 철철 넘쳐나는 은사주의 목사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그의 ‘영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성 같은 것은 없고 오로지 성령충만과 진리의 실행이 있을 뿐이다.

비성경적인 레노바레 영성운동은 마귀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귀 들린 무당들도 리차드처럼 상대방의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고 말씀한다(요일 4:1).

그 사람의 입에서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며,

그의 “신비주의적 영성” 역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악한 영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신문에 따르면, 리차드 포스터는 테레사 수녀의 <기도의 궁전>이라는 책을 읽다가

기도하던 중 상처가 많이 나 있고 열려 있는 ‘하나님의 심장’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고백했다.

신문은 그와 동시에 그가 “나는 네가 이 사역을 멈추길 원치 않는다.

대신 내 말씀을 전하라. 내 자녀들에게 내 심장이 부서져 있다는 걸 말해 주지 않겠니. 그들은 너무 번잡한 일에 붙잡혀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했다.


테레사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테레사는 구원받지 못한 카톨릭 수녀에 불과하며, 평소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거듭나지 못한 죄인이었다.

 

그녀가 전 세계적으로 ‘선행’을 하며 돌아다닌 것은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아보려는 비성경적인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고 주장하던 그녀가 <기도의 궁전>이라는 책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그것은 진리에 관해서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리차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책을 영의 양식 삼아 탐독했고, 그러던 중 환상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근거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환상이나 환청(하나님의 음성)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근거는 기록된 말씀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신약교회 사역의 철칙이다.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성경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아닌 리차드의 명성에 권위를 두고 그의 말을 따르는 이들은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 마귀의 교리를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신문은 리차드가

“하나님은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분을 초청하신다.

그분의 집에 슬리퍼를 신고 들어간다.

식탁으로 초청하신다.

그분이 베푼 잔치상(한국 음식도 차려져 있는)으로 부르셔서 힘을 얻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가길 원하신다.

그리고 나서 지혜가 가득한 도서실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궁금한 모든 것을 물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를 침실로 초대하신다.

긴밀하고 친밀한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곳으로 초청하신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가 원할 때 우리를 만나주신다.

철학자의 신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마리아, 나오미, 룻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여기 함께하시는 걸 믿으라.

이것이 위대한 초청인 이유는 하나님과의 은밀하고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리차드는 꿈과 환상에 젖어 사는 영적 어린 아이이다.

그가 늘어놓은 말들은 일말의 가치도 없는 ‘잠꼬대’에 불과한 것이다.

리차드는 하나님의 집에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 보았는가?

그곳 식탁에 차려진 한국 음식을 보았는가?

그분의 침실에도 들어가 보았는가?

도대체 이런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리차드는 그의 책 <기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을 ‘하나님의 마음의 거실’이라고 했다.

우리가 초청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이 우리 몸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되

“그리스도의 몸”에 영원히 들어가 있다고 말씀한다(고전 6:19, 롬 6:3, 고전 12:13, 갈 3:27, 롬 8:35-39).

또한 우리가 궁금한 것을 여쭐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마음의 거실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 말씀이 바로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식탁이요 잔치상이다.

 

 리차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용해 “삼류 감성소설 신학”을 정립하려 한 것 같다.

누가 리차드 포스터를 ‘영성의 거장’이라고 칭했던가?

‘영성’ 하면 뭔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지만,

그런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영성’이라는 말은 로마카톨릭이 지어낸 용어로,

금식과 고행 같은 육신적인 수행의 결과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다.

그것은 사막에서 고행하던 고대 수도자들이나 수도원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그들은 육신의 고통을 통해서 ‘영성’을 키우려고 했던 어리석은 죄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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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클라우드의 '기독교 서점 속의 위험'이라는 아티클 일부를 발췌/번역함. 
 

관상운동(觀想運動, contemplative movement)은 지난 10년간 복음주의권 내에서 산불과 같이 번져 나갔다. 관상운동은 리처드 포스터 같은 "복음주의" 구루들도 두고 있지만, 방법과 원리들은 로마 카톨릭 수도원에서 유래되었다.

인기 있는 관상 관련 저술가들 중엔 다음 사람들이 있다:


리처드 포스터 

사고(思考) 없는 명상을 통해 자신 내부의 깊은 곳의 "중심"을 향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고"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적 훈련과 성장/Celebration of Discipline P. 26)
심지어 그는, 명상 수행자들은 "당신이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는, 아버지와의 깊은 내면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P. 27)
포스터는 시각화(visualization) 훈련을 장려하는데, 몸을 떠난 개인이 "외계 깊숙이 들어가", "영원한 창조주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의 깊게 경청하여 지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영적 훈련과 성장 1978년본 P. 27-28)

포스터는 자신이 본 '환상'을 이렇게 기술하는 급진적 에큐메니스트이다:

     "나는 켄터키 산촌에서 온 카톨릭 수사와 로스앤젤레스 거리로부터 온 침례교 전도사가 함께 나란히 서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본다. 나는 사람들을 본다." (생명수의 물줄기/Streams of Living Water, 1998,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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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천여년 동안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과 우리들은 말씀에 따라서 기도를 해왔고 응답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뚱딴지 같이 무슨 관상기도니 집중기도니하며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최신예 기도 테크닉인양 떠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최신예 기도를 하여야 하나님과 깊어진다 ?  인간이 만든 기도 프로그램에 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 ? 부부 금슬이 좋지 않아 고민하는 부인에게 이러이러한 비방(부적등)을 사용하면 특효라고 말하는 무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카톨릭은 성경에도 없는 이상한 이단적 방법들을 만들어 내는데는 선수입니다. 화체설, 마리아 숭배, 교황무오, 파티마, 면죄부..... 카톨릭의 관상기도를 왜 개혁교회들이 좇아가야 합니까 ?  관상기도없이는 기도를 전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소원해지는 것입니까 ?  

 

뜨레스 디아스는 제수이트가 만든 영성 훈련입니다. 알파코스는 이 뜨레스디아스를 모체로 삼아 빈야드 운동과 결합하여 성공회 신부가 만든 것이며, 로마 카톨릭의 수많은 교구에서 공식 채택한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관상기도는 카톨릭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보십시요.

 

우리 교회들이 이러한 카톨릭적 영성 프로그램을 너도 나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파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 왜 이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개혁교회들에 전하려 합니까 ?  정말로 성경적인 프로그램들은 하나도 없고, 전부 은사주의 신비주의 일색입니다.  이들 프로그램을 세밀히 들여다 보면, 우리의 신앙을 다원주의와 신비주의로 변하게 하는 치명적 독소가 숨어 있습니다.

 

제발 정신차리고 성경으로 돌아가 개혁의 본연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