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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내적치유를 바르게 알자, 분별하자 - 내적치유의 허구성

by 서귀포강변교회 2010. 9. 3.

내적치유의 허구성


“내적치유”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내적치유 세미나를 다녀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 내적치유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아시는 분들은 극히 적습니다. 단지 방송에 나오는 유명하신 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런 세미나에 참석해서 울음을 터뜨리고 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눅 12:56; 딤후 2:15; 히 5:14).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그냥 따라 갈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제(2010.9.2) 소천한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인 옥성호 형제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냈습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이 나라 안에서 소위 “내적치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심리치유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번 소책자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다루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 영역에서 발견되는 과학의 좋은 점들을 배우고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내적치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의 위치를 성경의 진리와 대등한 하나님의 (일반)계시로 보이도록 교묘하게 표현합니다.

게리콜린스는 심리학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심리학을 과학이라고 할 경우에는 과학적 진리가 곧 하나님의 진리이듯이 심리학의 이론들도 하나님의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은 프로이드와 융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심리학이라고해도 마찬가지로 세상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실제로 삶으로 다가올 때 심각한 일들이 일어난다는데 있습니다. 기독교상담이라는 이름으로 ‘내적치유’를 행하는 것과 일반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정신치료’를 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거기에 기독교용어를 사용할뿐이지 실제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기독교서점에서 쉽게 접하여 읽고 있는, 시먼스의 책 “상한 감정의 치유”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시먼스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베티의 예’를 통하여 우울증에 걸린 베티를 치료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구상화치료”라고 합니다. 이런 방법을 국내에서는 어떤 분이 주요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베티 이야기 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국내의 내적치유의 문제점을 지적하겠습니다.


첫째, 시먼스가 ‘기도’라고 언급한 것이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의 아기 침대 장면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셨다.

베티 내가 당신에게 숙제를 좀 내려고 하는데 시간을 내어 그것을 가지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시먼스가 말하는 기도라는 것은 ‘최면상태’를 의미함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시먼스는 최면 상태의 베티에게 말을 걸고 베티는 최면상태에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모 세미나를 가면, 참석자들에게 눈을 감게 하고 어머니의 뱃 속에 있는 태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 태아가 어머니의 내면의 소리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최면상태로 끌고 갑니다. 앞에서 멘트를 하는 분은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딸을 갖게 되어서 깊은 고통을 느끼고 태아는 버림을 당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계속 말을 해가면, 그 사람들 중에 나이 40이 넘으신 분들이 “엄마” 하면서 몸부림을 치면서 엄마를 용서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치유를 받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면 이런 과정들은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치료방법을 그대로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이 나이(40대)에 엄마 뱃 속에서 느낀 것을 느끼라고 하니, 내가 무슨 아인슈타인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 그냥 멍하니 있다가 왔습니다” 이 말이 사실입니다. 아인슈타인이라도 그런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며, 사람은 그 때의 일을 기억할만큼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

“결혼 전에 치유받아야할 마음의 상처”라는 책에 보면 대개가 이런 ‘구상화치료’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48페이지에 보면, 6살된 아이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일로 인해서 괴로워 하는 한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상처를 치유받았다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정죄감으로 시달렸습니다.

"..., 나를 정죄하는 사단에게서 풀려난 것을 체험한 저는 이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강의도 들어오지 않았던 저에게 한마디 들리는 소리가 있었어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 솔직히 말해보라는 강의자의 말이었어요.

그때 저는 정말 어린애처럼 우리 죽은 애가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집회시간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저에게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 옆구리에 누군가가 있는 거에요. 자세히 보니 제 아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제게 가까이 오시자 저는 아마아이를 제게 넘겨주시려고 하나보다 생각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이를 저에게 주시지 않고 옆으로 내려놓으시는 거에요. 그리고 저를 안아주시더니 다시 아이 손을 잡고 돌아서 가시더군요.

한시도 저를 떨어지려고 하지 않던 애였는데 이상하게도 저에게 오려고 하지도 않고 너무 평안하게 저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하는 것처럼요. 그 장면은 제게 아이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치유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슬픔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전처럼 지옥을 헤매는 것 같은 절망과 고통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마음은 너무나 슬픈거에요. 그런데 주님이 저에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자식 잃은 슬픔을 알고 있다.' 주님의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알았어요. 세미나에서 예수님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그 주님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의 그 말씀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내 속의 이 슬픔을 하나님이 체험해 보셨다는 말씀 앞에서 저는 다시 저만을 위해 울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아이들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죽고 난 이후 저 때문이라는 정죄감과 죄책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상대적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제 마음에는 평강이 있고 이 일로 인해 더 넓은 눈으로 인생을 보고 저의 할 일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은 너무도 실제적이었습니다."

이것을 해석한 주서택목사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은 이 세상의 어떤 능력과 지혜로도 치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깨어진 엄마의 마음을 치유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시는 치유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 말씀과 교리에 기초하지 않은 ‘심리이설’에 기초한 방법입니다. ‘심리이설’이라 함은 기독교와 심리학을 통합한 것을 말합니다.

이 치유과정에서 틀린 것을 두 가지만 생각해 보면,

1) 사탄의 정죄라고 했는데, 사탄의 정죄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죽은 아이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는 성경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2) 정죄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했는데,
욥은 자기 자녀들을 다 잃고 난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 자녀들도 갑작스런 재난으로 다 죽었습니다.
(욥 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둘째, 시먼스는 심리학 이론으로 성경을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부르짖음을 최면 상태에서 나오는 베티의 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적용은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 착각에서 나온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께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예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이해하실 것이라는 주장은 언뜻보면,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말씀과 관계가 있는 듯 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인간과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이지 여기서 말하는 상황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저자의 논리대로 하자면, ‘결혼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결혼한 이 세상의 수많은 가정의 문제들을 이해하실 수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나오고 맙니다.

세 번째, 시먼스의 최면치료법은 휴스턴의 심리치료법과 다르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시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순간을 지금 돌이켜 상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 하나의 생명을 가진 세포가 어머니의 살아 있는 세포 속에 파고 들어갔을 때 당신의 존재가 가능케 되었던 그 특별한 순간을 상상해 보도록 하세요.

심리학자 진 휴스턴은 그의 정신심리치료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자 당신이 물고기였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그러자 약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룻바닥에 쓰러져 자신들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 속을 지느러미를 이용해 헤엄치듯이....,

“자, 여러분 지금 자신이 물고기가 되어서 헤엄치면서 느껴지는 세상이 어떤지 잘 기억하세요. 세상이 어떻게 보입니까, 어떻게 느껴지나요? 소리는 어떻게 들리고 어떤 냄새가 나며 어떤 맛을 느끼고 있습니까?”

“자 이제 당신은 육지로 올라옵니다” 휴스턴은 우리를 양서류 단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다시 휴스턴이 말했다.

“이제 당신이 파충류였던 때를 완전히 기억할 수 있도록 자신을 풀어 놓으십시오...이제 여러분 중 일부는 날아다녔습니다. 또 일부는 나무에 올랐지요...,”

우리는 순식간에 초기 포유류와 원숭이 그리고 유인원들이 내는 동물 소리와 움직임으로 가득 찬 동물원을 만들었다.

이미 열광적인 활동들로 흥분한 우리를 휴스턴은 이후 한 시간 이상 지속된 클라이맥스로 이끌고 갔다.

“자, 이제 나는 여러분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이 더 진화된 모습으로 여러분을 인도하겠습니다.”

이에 우리가 있는 장소는 점프를 하는 사람, 기쁨에 차 있는 사람, 혼자 있는 사람, 마침내 손들과 목소리들이 뒤엉킨 사람들로 가득 찬 방이 되었다.

휴스턴의 치료방법과 시먼스의 치료방법 사이에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시먼스의 치료가 세포상태에 이른 반면에 휴스턴은 범위가 넓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치료방법은 다 똑같습니다. 심리학자인 휴스턴이 사용하는 방법이나 목사인 시먼스가 사용하는 방법이 똑같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유사한 방법으로 국내에서는 소위 “내적치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지만 성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른채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절대가 무너지고 서로 상대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 전락하여 여러 분야 중의 하나, 다시 말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이런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종교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점점 더 그 중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믿는 바 그 핵심 교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성에 관한 입문서 중에 하나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고든맥도날드, IVP)을 많이 읽기도 하고 권하기도 합니다. 새로 나온 책은 국내의 유명한 목사님들께서 추천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세례요한을 두고, 쫓겨다니는 사람(Driven people)과 부름받은 사람(Called people)을 말하면서 내면세계의 질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맺음말" 물레질(p226)에서, 이렇게 내면세계의 질서가 잘 잡힌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마하트마 간디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께서도 분명히 잘 아시다시피,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주일날 목사님께서 설교 잘 하시고 난 다음에,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000사 주지스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종교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세상 종교와 심리학에 물들어가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요즘은 교회에서도 명상과 요가를 가르칩니다.

기독교 TV를 보니, 처음에는 요가하는 사람이 나와서 가르치더니, 그 다음에는 집사가 나와서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장로가 나와서 가르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보니까 목사가 나와서 요가를 가르치기시작했습니다.

 

요가는 단지 건강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요가를 하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으나 요가는 신이 되고자 하는, 쉽게 말하자면 소위 부처가 되려는 인간의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요가를 통해 쿤달리니 체험을 하고자 합니다. 인도사람들은 꼬리뼈에 뱀 한 마리가 꽈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가를 하면 꼬리뼈-정수리 번개불 체험을 하게 되는 황홀경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기독교인들도 꼬리뼈-정수리 번개불 체험을 하고 싶은지 요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쿤달리니 요가와 염불, 명상을 하고 구루에게서 가르침을 나눠받으면 이 뱀이 머리 꼭대기로 치솟는 '쿤달리니 각성'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요가를 하면 궁극적으로는 뱀 형상의 악령으로 나타납니다. '쿤달리니'란 말 자체가 '뱀심'(蛇力)이란 뜻입니다. 이런 끔찍하고도 섬뜩한 내용을 모른채 요가를 한다고 너도 나도 따라가니 참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그러니 부디 꼬리뼈-정수리 번개불 체험으로 뱀 형상의 악령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면 그만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살 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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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자들은  자신은  치유 받을 것이 없다" 한다.

그러면 주님이 필요없단 말인가?


이 말을 보면 마치 내적치유 받으러 안가면  예수님이 필요없는 사람같이 보인다.
'치유'라는  이름으로  먼저 나서기 때문에 문제다.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치유받으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먼저 "죄를 회개하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막 6:12) 

소위 내적치유를 말하는 사람들의 그 치유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억치유"다. 

다른 면에서는 최면치유로 사용이 되는 방법이다.그것이 다만 기독교라는 이름이 들어가고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차이일뿐  방법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신자된 우리에게는   내적치유라는  이름으로 기억치유, 최면치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죄를 회개하고  그 기록된 언약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만을  말하지않고  세상지식을  적당히 섞어서 가르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을 겪고 미혹을 받아 넘어진다.복음도  말했다가, 아닌 것도  말했다가, 비슷한 것도 말했다가...,
이러니 분별이 안되는  사람들은  좀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말에 넘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적 방법으로 하는 치유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 받은것을  그 마음에 온전히 믿는것을  원하신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가짜다.  상담과  그럴듯한 프로그램으로 하는 내적치유는  세상의 심리학에 찌들고 오염된 악성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내적치유세미나니  치유센타니 하는곳에  가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면된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성경을 읽어보라.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 1:1-4)
 
여호와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 죽을 것이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살아계신데 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갔느냐고 하셨듯이,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살아계신데 왜 심리학에 찌들고 오염된 내적치유를 받으러 갔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오늘도 거짓된 복음으로 가르치는 헛된 사상에 물들이지 말고,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만으로 자랑하고 그 새언약에 신실한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자!!!그것이 우리의 신자된 길이요 생명이다.
 
끝으로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