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목회단상

김정식, 우리 ‘꼴값’하고 삽시다

by 서귀포강변교회 2011. 2. 12.

김정식, 우리 ‘꼴값’하고 삽시다[중앙일보] 입력 2011.02.12 03:03 / 수정 2011.02.12 00:44

‘밥풀떼기’로 유명했던 옛 개그맨, 목사가 돼 봉사활동 주력

#1.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는 많이 아팠다. 먹고살려면 악다구니를 부려야 했다.

초등학생 때 술·담배를 배웠다. 3초 이상 눈이 마주치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주먹이 먼저 나갔다.

하루 하루를 저주하며 살았다.

 

#2. 개그맨이 됐다. 출연한 프로그램이 줄줄이 히트했다. 쓰고 남을 만큼 돈도 벌었다. 인기는 올라갔지만 그에 비례해 아집도 강해졌다. 늘 나만 옳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3. 장애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예쁜 ‘동생’이 하나 둘 늘어갔다. 봉사활동을 통해 여러 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종교와 장애인 봉사를 잇고 싶었다. 신학 공부를 했다. 목사가 됐다. 5년차 목사 김정식(52) 얘기다.

글=김선하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김 목사는 키가 작다. 본인 말에 따르면 1m62㎝다. 개그맨 시절 그는 작은 키를 무기로 활용했다. 임하룡과 함께 출연한 ‘도시의 천사’란 코너에서 ‘밥풀떼기’란 별명의 키 작은 건달 역할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그는 “키가 작아 그랬는지 몰라도 그때는 담장 밖의 세상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 발뒤꿈치를 들고 담장 너머를 바라봤더니 세상이 너무 아름답더라”는 말도 했다.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린 그 순간 그의 ‘인생 3막’이 열렸다.

●뭐가 그리 아름답던가.
 “6~7년 전 인터넷 장애인 방송을 진행할 때다.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중증 뇌병변장애인 동생이 있다. 어느 날 불쑥 ‘전병 과자 좋아하느냐’고 묻더라. 그렇다고 했더니 과자를 사 들고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 강남의 스튜디오까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왔다. 그것도 한겨울에. 몸은 말도 못하게 꽁꽁 얼었고, 무릎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엔 과자가 겨우 서너 개 남아 있었다. 알고 보니 도로에서 휠체어가 덜컹거릴 때마다 하나씩 떨어뜨렸나 보더라. 몸이 불편하니 도로 줍지도 못했을 것이고…. 과자를 씹으며 내내 울었다. 내가 과연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돌아봤다. 그 친구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죽을 때까지 장애인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어떤 장애인 단체를 어떻게 돕나.
 “장애인 ‘단체’는 안 돕는다. 단체가 있는 분들은 제도권에서 지원하니까 굳이 나까지 나서지 않아도 된다. 대신 전국의 인가 받지 못한 장애인 시설을 지원한다. 한 80곳쯤 된다.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있어도 찾아간다. 희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도 도울 수 있다면 돕는다. 전국의 교회에서 한 달에 네댓 번 정도 나를 초청해주는데, 참석하면 한 번에 몇십만원씩 주신다. 이 돈은 모두 장애인 관련 활동에 쓴다. 또 이렇게 인연을 맺은 교회 중에 고맙게도 쌀·내복을 비롯한 물품을 지원해주는 곳이 여럿 생겼다. 몸 쓰는 일이 필요할 때는 가서 몸으로 한다.”

 그의 손바닥은 흡사 발바닥 같았다. 접히는 부분을 제외하곤 죄다 굳은살이었다. ‘몸 쓰는 일’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김 목사는 평소 양복을 자주 안 입는다고 했다. 촬영을 위해 정장을 요청했을 때도 “꼭 입어야 하느냐”고 여러 차례 되물었다. 차에는 운동화와 버너를 비롯한 취사도구도 싣고 다닌다. 돕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11년째 장애인 봉사활동을 해온 베테랑의 노하우다.

●그럼 목사는 왜 됐나.
 “장애인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전문적으로 사회복지 관련 활동을 하는 교회가 많더라. 한 번은 기독교인 희귀 난치병 환자 모임에 갔는데 난치병 아이를 둔 엄마가 대표로 감사 기도를 했다. 처음엔 ‘저 여자는 뭐가 그리 감사한가, 자기 아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기독교 다 뻥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내 새끼가 그렇게 아프면 감사가 되겠느냐 말이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아니더라. 기도를 통해 진심이 전해지니까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개인적 이유도 있다.

 

우리 어머니가 위독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기도했었다.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개그맨 김정식’으로 장애인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던 것도 이유다. 내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장애인에게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애인 때문이라면 꼭 목회자가 됐어야 했을까.
 “내가 목사가 된 것은 장애인에게 하나라도 더 좋은 걸 전해주기 위해 하나님이 운행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사회복지 예산을 절반으로 줄일 방법이 있다. 교회들이 발벗고 나서면 된다. 반경 2㎞ 안에 교회가 네댓 개씩 있는 지역이 많지 않나. 그러면 각 교회가 사방 1㎞만 맡으면 된다. 교인들이 자기 지역의 장애인·소년소녀가장·독거노인을 돌보면 된다는 얘기다. 해외선교 한다고 땅끝까지도 가는데 바로 옆 땅은 왜 못 돌보겠나. 다만 이런 활동의 목적이 전도가 되면 곤란하다고 본다. 그럼 또 영역 싸움이 돼 버린다.”

●직접 교회를 개척할 생각은 없나.
 “2007년 목사가 됐는데 장로 몇 분이 찾아왔다. 교회를 새로 개척하자고 했다. 수도권의 한 도시에 땅도 마련했다며 팔을 잡아 끌었다. 가보니 위치가 기가 막히더라. 솔직히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땅을 구경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여성 세 분이 ‘어머, 밥풀떼기다’ 하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같이 갔던 장로 한 분이 ‘이분이 목사가 되셔서 여기 교회 개척하실 것’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여성분들이 대뜸 ‘어머, 우리도 교회 옮겨야겠네’라고 말하더라.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교회 몇 곳이 눈에 띄었다. 내가 여기서 교회를 개척하려면 다른 교회 신도를 빼와야 한다는 뜻이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내가 목회자가 아니라 다시 연예인처럼 굴어야 하지 않겠나. 함께 간 장로분들께 ‘죄송하지만 안 되겠다’고 말하고 돌아왔다. 참회하며 많이 울었다.”

●듣다 보니 만날 반성하고 울었다는 얘기다.
 “매일 감동하며 우는 생활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나? 예전 같으면 내가 잘못했어도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버텼겠지만 지금은 내가 누구를 이기겠나. 이기겠다고 용을 쓰는 게 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 앞으로도 특정 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일은 없겠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크게 부족한 것은 아니지 않나. 다만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 간다. 언젠가 한 작은 노인요양시설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근처에 큰 교회가 있는데 왜 거기 부탁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몇 번을 연락했는데도 안 온다는 것이다. 죽을 날만 바라보는 노인들이 교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생각이었는진 몰라도…. 이런 곳에서 연락이 오면 언제라도 예배 드리러 간다. 바닷가의 한 작은 마을에서 기존 교회에 문제가 생겨 연세 많은 신자들이 갈 교회가 없어진 곳도 있다. 마침 내가 2000만원이 생겼다. 지난해 어머니 돌아가시고 부의금 받은 돈인데…. 이 돈으로 경로당 비슷한 사랑방 교회라도 하나 지어드릴까 생각하고 있다.”

●목사로서 신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꼴값’ 하고 살자는 것이다. 나잇값 하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사람의 모양에 맞는 행동, 즉 꼴값을 하는 것이다.”

●그럼 김 목사는 지금껏 ‘꼴값’하고 살았나.
 “못했다. 어릴 때는 한 끼를 해결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신 데가 많아서 약값도 많이 필요했고…. 인천에 살았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아침엔 신문 돌리고, 학교엔 도넛이나 자두를 사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이문을 붙여 팔았다. 기차에 무임승차해서 몰래 신문을 팔다가 열차 승무원과 싸운 적도 많다. 중학생 때는 어머니가 인천 연안부두에 노점을 열고 생선회 장사를 했다. 어머니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술 취한 사람들과 숱하게 싸웠다. 학교에서 유도부였기 때문에 싸움은 잘했다. 노점을 철거하려는 불도저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솔직히 길에서 다른 학생들 돈을 빼앗은 적도 있다. 사람 값이 뭔지도 잘 몰랐다.”

●형편이 많이 어려웠나 보다.
 “아버지는 곁에 없었고, 어머니는 뼈마디에 문제가 생기는 희귀병을 앓으셨다. 빈혈도 심하셨다. 형과 누나는 친척집 등을 전전했고, 막내인 내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원래 무허가 판잣집에 살았다. 고3 때였던 것 같은데 도저히 안 되겠기에 아르바이트한 돈을 들고 집을 구하러 나섰다. 인천 용현동에 빈 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흔히 말하는 ‘귀신 나오는 집’이더라. 혼자 들어가서 촛불 켜놓고 며칠 살아봤는데 귀신 안 나오더라고. 그래서 어머니 모시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이사를 마치고 모자가 부둥켜 안고 무지 울었다.”

개그맨 시절의 김정식 목사(왼쪽)와 임하룡씨.

 

●개그맨은 어떻게 하게 됐나.

 “1981년이니까 꼭 30년 전 얘긴데… 원래 인천의 통기타 클럽에서 노래도 부르고 가수들 관리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클럽에 출연하던 가수가 방송에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자랑을 많이 하더라. 대체 방송이 뭔가 싶었다. 방송 나가면 어머니 약값 마련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무작정 서울 KBS로 갔다.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던 ‘젊음의 행진’ 제작진을 찾아가 써 달라고 했다. 처음엔 단역으로 한두 번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반응이 좋았던지 계속 출연하게 됐다. 불과 몇 달 만에 개그맨 인기 순위 1~2위를 다툴 만큼 유명해졌다. 그런데 이듬해 군대를 가게 됐다.”

●고민이 좀 됐겠다.
 “만날 술로 살았다. 체중이 40㎏대까지 줄었다. 그때는 군대 가면 다 끝나는 줄 알았다. 실제로 휴가를 나왔더니 바쁘다며 피하는 동료가 많았다. 딱 한 명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이 임하룡 형이다. 하룡이 형도 가난했는데 나를 자기 집에 끌고 가더니 형수에게 쇠고기 반 근을 볶아서 내오게 하더라. 그리고 나갈 때 2만원인가 3만원인가를 용돈 하라며 내 손에 쥐어줬다. 우리 출연료가 1만50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시로선 제법 큰돈이었다. 가슴에 많이 남았다.”

●‘밥풀떼기’로 유명해진 다음은 어땠나.
 “어릴 때와 똑같았다. ‘꼴값’ 못했다. 주변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늘 나만 옳다고 생각했다. 연습에 늦었다고 후배들을 상처가 될 만큼 심하게 나무라기도 했다. 후배들 20명 가까이를 우리 집에서 먹이고, 재운 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배려가 아니라 객기였다.”

●미국 유학을 갔다가 중도 포기한 것으로 아는데.
 “98년 영화 공부를 하러 아내, 두 아이와 함께 떠났다. 그런데 2년 뒤인 2000년 잠시 귀국해서 보니 한국에 남아 있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더라. 도저히 다시 떠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아이들과 아내를 갑자기 돌아오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아내에게 ‘당신이 어머니를 10년 모셨으니, 이제 10년간 휴가를 준다’고 얘기하고 나 혼자 어머니를 모셨다. 치매란 병이 사람을 참 힘들게 하더라. 내가 집을 비우면 어머니가 없어지기도 하고, 문을 잠가 놓았더니 된장을 한 통 다 퍼 잡수시고 병이 나기도 하고. 그래서 뒤늦게 전문 요양시설에 모셨다. 어머니가 지난해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전문 시설에 모시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다. ‘김정식이 어머니 버렸다’는 말 듣기 싫어서 꺼렸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도 되고…. 비슷한 상황에 처한 분들이라면 꼭 처음부터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어떤 목사가 되고 싶나.
 “목사는 섬기는 사람이다. 섬긴다는 건 배려다. 목자는 예수님이고, 목사는 양치기 개다. 같은 동물인데 개와 양이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양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개가 되고 싶다. 목사가 된 다음에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바빠서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목사는 ‘쓰임’을 받아서 닳아 없어져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사람이니까 잘못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래서 목사란 직함을 주머니에서 꺼내 늘 손에 들고 다닌다.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해서다.”

●장애인 관련 활동 계획은.
 “재주도 없고, 별것도 아닌 내가 방송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20대에 이미 차를 몇 대씩 굴릴 정도로 풍족하게 살았다. 남들의 사랑을 받아 20년 가까이 떵떵거리고 살았으면 적어도 20년은 갚아야 할 것 아닌가. 앞으로의 꿈은 우리나라에 장애인예술대학을 세우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예술을 통해 자활하고, 전문가가 돼서 다시 다른 이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곁에서 돕고 싶다.”

j칵테일 >> 아내 이미혜씨는 이경재 전 의원의 맏딸
김 목사의 인생은 굴곡이 많다. 결혼도 그랬다. 아내 이미혜(48)씨는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경재(민주당) 전 의원의 맏딸이다. 김 목사는 개그맨 시절인 1984년 동료 개그맨 주병진씨가 운영하던 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러 온 아내를 처음 만났다. 각자 동행한 사람들 중에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어 합석하게 됐는데 그 여자, 참 근사하더란다.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여대생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두 번째 만남에서 불쑥 “우리 결혼합시다”라고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내 이씨는 “별 정신 나간 사람 다 보겠네”라며 화를 내고 일어나버렸다.
 

김정식 목사의 가족.

 

그게 오기를 자극했다. 나름대로 유명 개그맨이란 자부심이 있었는데 속이 상했다. 아내의 집으로 끊임없이 구애 전화를 했다. 그런데 채 가까워지기도 전에 ‘열애설’이 보도됐다. 처가에선 당연히 발끈했다. 하지만 그게 되레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둘은 처가의 반대 속에 86년 12월 친구 몇 명만 증인으로 세우고 결혼했다.

김 목사가 처가에서 인정받은 것은 6년 뒤인 92년. 장인인 이 전 의원이 서울 구로을 선거구에 출마했을 때다. 어느 날 김 목사의 다섯 살배기 딸이 잠꼬대를 하며 “기호 2번 이경재”라고 말했다. 아내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알고 보니 남편 몰래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었다. 김 목사는 “당신이 원하는 게 뭐냐,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그래도 아빠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 목사는 그 길로 장인의 선거운동에 나섰다. 어느 날 선거사무소 앞에서 장인과 마주쳤다. 장인은 그의 손을 잡더니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 아이가 내 맏사위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그때 정말 겁나게 울었다”고 회상했다. 그해 6월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목사가 된 남편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내 이씨는 j와 만나 “남편이 다른 건 좋은데 인내심이 부족했다”며 “목회자가 되면서 참고 기다리는 법을 굉장히 많이 배운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