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감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일이다. 마감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임을 잘 알기에 당신을 위한 겨울 여행을 제안한다. 제주도는 지는 해와 뜨는 해 모두를 품는 넉넉한 섬이다. 그래서 제주도가 좋다. '제주도의 푸른 밤' 가사처럼 '도시의 침묵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을 좋아할 당신만을 위한 2014년의 마지막 겨울 여행이 되길 바라며….
광치기해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과 일출.
제주 올레길에서 가장 인상 깊은 1코스
올레길이 개통된 지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전체 구간을 완주한 여행자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공통된 특징은 대부분 수년에 걸쳐 완주했다는 것. 제주도가 갖는 지리적인 특징 때문일 게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간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1코스를 꼽는다. 오름에서 내려다본 제주도의 풍경을 잊을 수 없어서다.
1코스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 옆 돌담길에서 시작한다. 걷기 좋은 봄, 가을에는 현지인들보다 올레꾼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올레길에 들어서면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 이어진다. 야트막한 돌담이 밭과 밭의 경계를 나눈다. 돌담은 누가 쌓았는지 곧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 불규칙이 나름의 건축미학인 듯하다. 그 사이사이 홍당무가 심겼다. 푸른 무청이 계절을 잊게 한다.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 덕에 여행자들의 눈길과 발길은 바쁘다. 1km 정도 돌담길을 걸어가니 올레 1코스 안내소에 발길이 닿는다. 안내소에서는 지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따뜻한 차를 나누며 여행자들끼리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행의 재미는 여행자들끼리 정보를 나누며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이곳은 올레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 올레길에서 만나는 감귤. 2 올레 1코스가 시작되는 시흥초교 입구.
초록빛 대형 보자기가 펼쳐지다
안내소에서 100여 미터를 걸어가자 숲길로 들어선다.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는 재미를 더한다. 등산화가 아니어도 좋고, 걷기 고수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누구나 운동화 하나에 의지한 채 걸을 수 있는 숲길이다. 다만 곳곳에 소와 말이 실례한 흔적이 있으니 잘 살펴보고 걸어야 한다. 숲길을 따라 10여 분 걸어가면 산불관리초소가 보인다. 말미오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구간이 목전이다.
드디어 시야가 탁 트인다. 장쾌하게 펼쳐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말로만 듣던 좌(左) 우도, 우(右) 성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흥초교에서 출발할 때 본 돌담길도 구불구불 이어진다. 내가 걸어온 돌담길이지만 그 속에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전체를 볼 수 있다. 마치 헝겊을 이어 붙여 보자기를 만들어놓은 것 같다. 이처럼 큰 보자기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시인 김춘수는 보자기의 미학에 대해 "우리 배달겨레의 예술 감각이요, 생활 감정이다. 거기에는 기하학적 구도와 선이 있고 콜라주의 기법이 있다"라고 했다. 새벽녘에는 성산일출봉 주변으로 솟아오르는 일출까지 감상할 수 있다. 그야말로 1코스의 하이라이트 지점이다.
종달시흥간 해안도로의 풍경.
말미오름에 오르면 좌 우도, 우 성산을 볼 수 있다.
말미오름에서 알오름으로 가는 구간은 숨이 찰 정도로 경사가 가파르다. 물론 길지 않은 구간이니 걱정은 붙들어 매자. 알오름은 독립된 오름이 아니라 오름에 딸린 작은 화산체를 일컫는다. 알오름을 내려서면 종달리 대로변까지 시멘트 길이 이어진다. 올레길 리본과 표식이 없다면 황당해할 지점이다. 파란색은 정방향, 주황색은 역방향을 뜻한다. 비록 시멘트 길이지만 돌담과 푸른 무청이 친구가 돼주니 걸을 만하다. 종달리는 땅의 끝, 땅의 꼬리란 의미다. 즉, 제주도 본섬에서 가장 동쪽 끝 마을이란 뜻이다. 종달리사거리가 있는 대로변을 지나면 종달초등학교가 나온다. 전교생이 50명 안팎인 작은 시골 학교다. 종달리주민회관에서 1km 정도 걸어가면 종달시흥간 해변도로다. 현무암처럼 새까만 아스팔트 구간이 이어진다. 그래도 괜찮다. 가장 제주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으니. 4km 정도 걸으니 말오름에서 봤던 성산일출봉 앞에 도착한다.
성산일출봉에서 내려다본 풍경.
성산리 마을에서 해녀를 태우고 뱃일을 떠나고 있다.
태곳적 풍광이 거대한 감동으로 밀려오다
제주도의 세계적인 명성 때문인지 중국어, 영어, 태국어 등 다국적 언어가 사방에서 쏟아진다. 여기까지 왔는데 성산일출봉에 안 오를 수 없지. 씩씩하게 길을 재촉한다. 정상까지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진다. 해발 180m밖에 되지 않지만 체감 높이는 그 이상이다. 쉬엄쉬엄 오르며 발아래 펼쳐지는 풍광도 가슴에 담아야 하니 욕심낼 필요가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성산항의 전경과 창조주의 손길이 닿은 바위 뒤로 색색의 성냥갑 집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어디에 내놓아도 절대 빠지지 않을 감동적인 풍광이다. 성산일출봉 정상에 올라 흐르는 땀을 식힌다. 초록색 화채 그릇처럼 속이 움푹 파인 화산지형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먼 옛날 뜨거운 용암이 분출한 뒤 지금은 초록색 융단이 세월의 무상함을 덮어주고 있다.
1코스의 마지막 광치기해변
분주한 성산리를 벗어나면 다시 한적한 도로다. 1.5km 정도 걸어가면 올레길 1코스의 종점인 광치기해변이다. 성산일출봉에서 앞태를 보았다면 고혹적인 뒤태는 광치기해변에서 볼 수 있다. 원래 미인은 조금 거리를 두고 보아야 더 아름다운 법이 아닌가.
광치기해변으로 가는 도로변, 한치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광치기란 제주도 말로 '넓은 반석'이란 뜻이다. 광치기의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옛날 뱃일 나간 어부들이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면 어부의 시신이 해변으로 밀려왔다. 그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마을 주민들이 관을 짜서 시신을 수습했다 하여 지역 사람들이 '관치기해변'이라 불렀다는 것. 이것이 변해서 광치기해변이 됐다고 전해진다. 어느 설이 맞든지 성산일출봉의 자태, 광치기해변의 암반, 아름다운 해돋이가 삼박자를 이룬 장관임에는 틀림없다.
광치기해변의 반석에는 해초가 융단처럼 포근하게 깔렸다. 해초가 뒤덮은 반석은 미끄러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검은 모래도 이채롭다.
광치기해변은 사진가들에게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한 일출 사진 출사 포인트로 유명하다. 광치기해변의 독특한 지형과 연두색 해조류, 신비로운 바다 빛깔이 성산일출봉과 어우러져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없는 비경을 선보인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바다 빛깔을 감상할 수 있다. 이로써 총 15.6km의 올레 1코스를 걸었다. 5시간이 걸렸다. 광치기해변은 1코스가 끝나고 2코스에게 바통을 넘기는 곳이다.
1 야경이 아름다운 새연교. 2 이중섭 미술관 내부.
3 이중섭 거리에는 카페와 공방이 즐비하다.
4 여행자를 맞이하는 이중섭 미술관의 이중섭 조각상.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을 한자리에서
불운한 시대, 불운한 삶을 살다 간 천재 화가 이중섭은 한국전쟁 때 제주도 서귀포로 피란을 왔다.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1.4평의 좁은 방에서 생활했다. 비록 반찬도 없이 밥을 먹고, 고구마나 게를 삶아 끼니를 때우는 비참한 생활이었지만 작가는 그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이중섭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은 물론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남덕)와 주고받은 편지도 전시돼 있다. 작품보다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에 더욱 눈이 간다. 아니 마음이 간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 거리는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차 없는 거리가 된다. 미술관 주변에 멋진 카페와 공방이 여럿 있다. 저녁시간이라면 미술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새연교를 찾아보자. 제주도 전통 배인 태우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다리인데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제주도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섭지코지.
2014년의 마지막 태양을 만나는 감동
섭지코지는 해넘이가 아름다운 곳이다. 코지는 제주도 말로 '바다를 향해 돌출된 지형'을 뜻한다. 그런 만큼 사나운 파도와 모진 바람이 뒤섞여 무서울 정도로 휘몰아친다. 해안 절벽에는 철을 잊은 감국이 지천에 피었다. 감국은 향이 좋아 말려서 차로 많이 이용된다. 빼어난 절경은 섭지코지가 전부가 아니다. 아스라이 떠 있는 성산일출봉의 모습 또한 놓치면 아깝다. 내친김에 과거 왜적의 침입을 알렸던 봉수대까지 올라가 본다. 무서운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바람 탓에 서 있기조차 힘들다. 요란한 제주도 바람의 인사법인가 보다. 드라마 '올인'에서 여주인공이 생활하던 수녀원 세트장 뒤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고운 해가 작별을 고한다. 한 해 동안 수고한 우리 모두를 위로하듯 고운 빛을 남기고서 말이다.
Tip 임운석 작가의 안전한 올레길 가이드
첫째, 반드시 물과 간식거리를 준비한다. 둘째, 표식(화살표와 리본)을 따라 정해진 길을 따르자. 셋째, 혼자 걷는 여성이라면 제주올레콜센터(064-762-2190)를 기억할 것. 넷째, 길을 잃었다면 마지막 표식을 본 자리로 되돌아가서 표식을 천천히 살펴보자. 다섯째, 겨울에는 오후 5시 이전에 걷기를 마무리한다.
제주에서 먹을 것
성산일출봉 인근에 있는 우리봉식당(064-782-0032)은 오분자기뚝배기가 좋다. 일오반식당(064-782-5250)은 성산 일출을 감상한 뒤 아침 식사가 가능하다. 해녀식당(064-783-4158)은 회국수와 옥돔구이가 유명하다. 이중섭 거리에 있는 중섭식당(064-763-1277)은 몸국이 괜찮고, 카페 메이비(070-4143-0639)는 남미의 여느 카페가 부럽지 않을 만큼 음악과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서는 싱싱한 활어 회를 포장해 가져갈 수 있다.
1 해녀식당의 옥돔구이정식. 2 제주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오분자기뚝배기.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카페 메이비.
제주에서 머물 곳
섭지코지에 자리한 휘닉스 아일랜드(1577-0069) 벨라테라스는 전 객실이 오션뷰를 자랑한다. 수영장과 사우나 등 최고의 시설을 갖췄다. 킴스캐빈(064-783-5026)은 2~5인실을 갖춘 게스트 하우스이다. 신축 건물이라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원목으로 만든 침대와 정갈한 침구 등이 만족할 만하다. 해물죽이 아침 식사로 제공된다. 올레길 1코스 말미오름 아래에 있다. 성산일출봉에서 해맞이를 하고 싶다면 해바라기 게스트 하우스(010-9687-3232), 성산해비치 게스트 하우스(064-784-0864)를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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