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말
엊그제 뉴스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등지의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가해 어린이와 피해 어린이가 대략 100여 명이나 된다고 하고, 성폭행 피해 어린이들 중에는 여자 애들도 있다고 하는 뉴스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역사 이래 눈부신 첨단 과학과 세분된 다양한 분야의 가장 발달된 교육 체계가, 지식과 기술과 정보와 돈벌이 등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인간 자체 건설에는 실패했습니다. 영육의 존재인 인간의 영성과 심성의 발달에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인간 자체 건설이란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제품이 아닌 가능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창조의 섭리를 좇아 아기를 낳는 것도 힘들지만, 기르는 것은 더 힘든 것입니다. 동물이 새끼를 기르듯이 밥이나 먹여 주고, 장난감이나 사 주고, 학비를 내주는 정도라면, 기르는 것이 그렇게까지 힘들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랑의 지도와 양육을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바울 사도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원문에는, ‘아비 된 자여, 너희도······’라고 하여,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 못지않게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바울 사도가 선각자로서의 영적 예지가 얼마나 탁월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로마에는 ‘부권’ 제도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법적으로 부여한 것입니다. 가족을 노예로 팔거나, 사형에 처하게 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 부권은 자녀의 평생에 걸쳐 효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한 제도와 의식 때문에 로마 광장에까지 버려진 자녀들이 있었고, 버려진 자녀들을 데려가 길러서 노예로 삼거나 매음굴에 파는 어른들도 있었습니다. 병이 있거나, 장애 자녀들은 더욱 쉽게 버려졌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당시의 자녀란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되어 살아야 할 고유의 인격체가 아니라, 부모의 소유물로 취급됐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의 사도인 바울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를 강조했고,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가혹할 경우에는, 자녀가 불안해하며 의기소침해지거나,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제약을 많이 받는 바람에 난폭해지게 됩니다.
둘째, 과잉보호나 편애를 할 경우에는, 자녀가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자기 본위가 되어 협동이나 공존을 모르게 됩니다. 웬만한 것은 부모가 다 해 줘 버릇해서 자녀가 성취의 능력도 성취의 기쁨도 모르고 자라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면 옴츠러지고, 자학과 자괴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실상, 최적의 환경인 온실 속에서는 큰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자유방임하거나, 무관심할 경우에는, 자녀가 소외감과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시달리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냉혈한이 되기도 합니다.
넷째, 자녀를 고유의 인격체가 아닌 자기 분신이나 소유물로 여겨 경시하거나 무시할 경우에는, 자녀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 대신에 심한 열등감에 빠지고, 자기 상실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녀란 부모의 분신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부모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피조물인 고유의 인격체입니다. 자녀란 부모가 아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개성과 재능과 소질을 가꿔 그 자신의 길을 가면서 이뤄야 할 그 자신의 계획과 목적이 있는 인격체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심겨지지 않은 채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서 자녀들과 함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꿈이며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린 자녀들도 나름대로의 눈치도 있고, 자존심도 있고, 부러움도 있고, 욕심도 있고, 생각도 있고, 계획도 있고, 꿈도 있는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3.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들은 부모의 꿈이요 소망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의 꿈이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교육이란 다른 모든 자녀들과 평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각자의 꿈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돕는 부모의 의무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바울 사도는 자녀 교육에 대해, 한마디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했습니다.
“교양”이란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이며 ‘교정’, ‘징계’, ‘자제’, ‘수양’ 등을 의미합니다. 또, 이 파이데이아는 적절한 보상이나 체벌이 따르는 훈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시대엔, 아이를 한둘만 낳고, 왕자나 공주처럼 떠받들며 키우는데, 이렇게 키우는 게 큰 문제입니다. 자라는 자녀들의 머릿속에는 부모가 부모가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 있는 사람처럼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자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부모를 섬겨야 할 윗사람으로 생각할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부모여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위치와 권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종교 개혁을 한 루터(M. Luther)는 “채찍을 아끼면 자녀를 버린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놓아두었다가 잘했을 때는 그 사과를 주어라.”라고 했습니다. 잠언 22:15에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라고 하였고, 잠언 29:15에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파이데이아는 부모의 생각이나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과 말씀에 입각하여 사랑으로 행해져야만 합니다.
“훈계”란 누테시아(νουθεσία)이며 ‘격려’, ‘충고’, ‘힐책’, ‘말씀을 통한 훈육’ 등을 의미합니다.
모든 교육, 특히 자녀 교육에는 힐책이나 체벌보다는 격려와 충고 그리고 말씀을 통한 훈육이 더 중요합니다. 책망이나 체벌로 주눅들고, 노여워진 자녀에게는 교육 효과가 반감되거나 역효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보다 더한 것을 해낼 수 있다고 격려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대신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훈육이 아닌 대화를 통한 훈육이 보다 효과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주석」을 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수영을 배운 다음에 비로소 물속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또한, 어린 새가 보금자리에만 안주하려고 하면 그 새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누테시아 역시 부모의 훈계가 아니라, 주님의 훈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에 입각하여 격려하고, 충고하고, 책망하고, 훈육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유머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셈본아, 네가 천 원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너의 아버지께 천 원을 더 달라고 했어. 그러면 모두 얼마가 될까?” 하고 물었습니다. 셈본은 자신 있게 “천 원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맥이 빠진 선생님이, “너는 산수를 모르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맥이 빠진 셈본이, “선생님은 저의 아버지를 모르시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자녀 교육에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부모의 교양과 훈계가 아닌 주님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지신 주님의 뜻과 말씀에 합당한 격려와 체벌이 따르는 교육과 훈련입니다. 부모는 그 주님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보다 먼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계속 양육되어야 합니다.
4. 맺음말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고유의 인격체입니다. 우리는 그 자녀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과 덕을 끼치는 인물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풍성감리교회. 저서: 신약 27권 주석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 Salvation Before Jesus Came / 바울의 인간 이해/ 설교집 18권. T. 426-3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