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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스크랩] 소록도-김신아장로 아름다운 생애

by 서귀포강변교회 2008. 5. 24.

 

 

 

 한센병 껍질 뚫고

 

새싹으로 살았던 김신아 장로

 

광주동산교회 황영준 목사

 

 

 김 장로님이 세상을 떠난 일로 마음이 허전했는데 이제 해가 바뀌었다.

지난 해 9월, 소록도 중앙교회에서 있을 김신아 장로님(1924년~2007년 9월 22일)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이른 새벽에 광주를 나서서 소록도중앙교회에 도착하니 장례식이 곧 시작되었다. 9시 30분. 4, 50명 조객 가운데는 소록도 믿음의 형제들 말고도 육지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손님들도 많다.

2007년 들어 41번째 교인 장례식이었다. 박주천 담임목사님 사회와 설교 후에 화장장으로 옮겨 마지막 예배를 드릴 때는 내가 축도를 드렸다. 84세 되기까지 병든 몸으로 살아오다가 주님이 예비한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가신 것을 생각하니 사별의 아쉬움 보다는 위로와 소망의 시간이었다.

 

7월에 집으로 찾아가서 뵈었을 때도 양복 정장을 하고 기다리셨던 분. 항상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자상하고 따뜻했던 분. 한 주 전에 해외 선교를 위한 선교비 지원에 관해 전화를 했었는데 9월 24일에 별세했다.

                                         ⓒ 광주동산교회 황영준 목사

소록도에 가면 중앙리 26호 방으로 찾아가 함께 찬송하고 기도를 했었다.

외국으로 선교여행을 가면 김장로님께도 기도를 부탁했다. 새벽기도만 아니라 밤낮없이 기도하는 것이 일과라서 든든한 기도 후원자가 되어주셨다. 지난번 A국 가정교회 지도자 강의를 갈 때는 봉투 하나를 챙겨주신다. 그곳 교역자들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며 건네주는 것이다.

그곳 교역자들에게 한센인 장로님이 여러분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며 봉투를 내놓으니 교회에 돌아가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힘겨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나라와 선교에 대한 관심과 섬김이 큰 감동이라는 것이었다.

한 번은 A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부부와 함께 김 장로님을 방문했더니 큰 마음먹고 작정한 일이라며 선교헌금을 드리겠다고 한다. 말씀을 들으니 당신에게는 귀하게 모아두었던 금액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장로님의 생활이 어렵고 권사님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돈 쓸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사양했다. 그래도 장로님은 하나님의 종이 자기 집에 오신 것이 특별한 은혜이며 의미 있는 만남이라 하고 선교비를 드리고 싶어 했다.

내가 가로막을 일이 아니었다.

더 기도하고 결정하라고 했다가 2주 후에 연락하여 선교헌금을 전해 받았다. 곁에서 대화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신 선교사는 다음에 천국에서 장로님을 뵙게 되면 "그 때 그 선교비 어떻게 쓰셨어요?" 궁금해서 물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일로 교회가 지원하는 선교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깊이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 장로님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가르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섬기고, 나누고 가셨다.

여덟 살 어린아이. 왼쪽 팔목에 이상하게 나타난 증상이 나중에는 바늘로 찔러보아도 무감각이었다.

그래도 외부로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서 학교를 다녔고 사천에서 부산으로 이사해서는 부산상고를 나왔다. 체육시간이면 화장실에 숨거나 핑계를 잡아 불참하며 나병을 감추었다. 신앙생활은 열심이었다. 아버지와 부산진교회를 다니며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했다. 주일만 아니라 수요일도 빠짐없이 출석하여 설교를 들었다. 예수님처럼 나도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가난한 사람과 어려운 사람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살겠다는 다짐도 했다.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아침이면 들에 나가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트럼펫에 반해서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도 배웠다.

상고를 졸업하고 처음 직장으로 자동차 공장 경리부에 출근했지만

그 때부터 병 증상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옷으로 덮었던 몸만 아니라 얼굴에까지 번지는 증상으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이며 흐느껴 울었다. 소문은 회사와 교회와 이웃으로 번졌다. 3년을 중죄인처럼 골방에서 살다가 수용시설에 들어갔다.

1945년에 애락원에 입원했고 중도에는 실명했다.

그 때부터 오직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1961년에 애생교회 장로장립 했고, 1968년에는 한센병 완치(애생병원)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육체적 장애 때문에 소록도에 들어왔다. 성실고등성경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꿈을 심어주었다. 그 때는 소록도 원생이 5, 6천명에 이르렀고 청소년들도 많았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7개 교회는 한국 교회 성령운동의 본거지 노릇을 했다. 1974년 여의도에 백만 성도가 모였던 '엑스플로74 기독교세계복음화대성회' 때는 성공적인 집회가 되도록 전 교인이 합심하여 기도했다고 기억한다. 손양원 목사님이 방문해서 "당신들은 이 나라의 제사장입니다.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늘의 사명입니다." 하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김 장로님도 새벽이면 월요일은 호남, 화요일은 충청, 수요일은 경기, 목요일은 서울과 강원, 금요일은 경남과 부산, 주일은 해외를 짚으며 알고 지내온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 광주동산교회 황영준 목사


1977년에는 충북 청원에 사는 한센인들의 초청으로 정착촌 개척을 위해 그곳으로 이사했다.

돼지새끼 18마리를 자활정착 성공의 종자로 가져갔다. 먼저 교회를 세우고 갖은 고생을 하며 충광농원을 성공적으로 개척했다. 그곳이 자활정착사업의 모델이 되어 일본에서 연구답사팀과 봉사팀이 찾아왔다. 일본식 교육을 받은 장로님은 그들에게 좋은 사례를 설명해 주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분들과 교제하며 전도했다.

어려운 장애자 시설을 돕기 위해 찬양 테이프를 만들어 판매한 일도 있었다.

본인의 찬양을 테이프로 만들어 70세 노약한 몸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100여 개 교회를 다녔다. 아내가 앞 못 보는 남편을 한 손으로 부축하고, 한 손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힘들게 교회 순회에 나섰다. 이런 모습이 때로는 사람들의 조소거리였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소개 되고, 장애인자선음악회에도 나갔다. 대전극동방송은 김 장로님의 일생을 방송으로 제작하여 세상에 소개했다.

부인 정 권사님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다시 소록도에 들어와 부인을 입원시켰다.

몸이 마비되고 언어 능력도 상실한 채 여러 해를 병상에 누어있는 아내. 젊어서 부부로 만나 한 평생을 함께 살며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자신의 눈 역할을 해 주었던 아내에게 마음 정성을 다했다. 시각장애자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병원으로 찾아가 하모니카로 찬양하고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병실에 있는 분들이 함께 위로를 받았고 이들의 부부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이 일이 알려져 SBS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하모니카 부는 할아버지'로 소개되었다.

발병 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의 자서전(하나님 나의 하나님. Break Media)에 이렇게 썼다. "우리 가정은 일찍이 예수님을 믿는 가정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그런 잡귀며 주초 같은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지냈다. 또 나 자신도 학생 백 명 중 혼자만이 교회에 다녔는데 무슨 대역죄로 나를 벌하시는 것일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나는 내 죄 까닭에 하늘이 내린 병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천형(天刑)이라 하는 한센병 환자들이면 누구나 겪었던 괴로움이었다.

그래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한 맹인 이야기를 읽었다. 나면서 맹인이었다. 사람들은 가족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주님 말씀은 달랐다.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화장장에서 마지막 예배에 축도하는 황영준 목사/소록도 화장장


세상에서 듣지 못했던 말, 깜짝 놀랄 해석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이 나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사랑의 하나님이 이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이루시고 영광 받으시려는 목적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 김신아는 이 말씀으로 평안을 얻었다. 주님이 흙을 이겨 소년의 두 눈에 발라주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고 고쳐주셨던 그 사랑이 내게도 하나님의 섭리로 믿어진 것이다.

사람들을 피해 혼자 다니며 시간을 보내던 조용한 숲에서였다.

나뭇가지 껍질을 뚫고 뾰족이 내미는 새순이 보였다. 그것은 생명력이었다. 마음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추운 겨울, 그를 가두어 두었던 껍질을 벗고 나오는 저 희망찬 모습을 보라. 새싹처럼 너도 너를 둘러싼 모진 껍질을 뚫어라. 빛나는 도약을 할 수 있다. 용기를 내어라. 희망을 가져라...' 태산 같은 무게의 모든 짐이 벗겨졌다. '이제 내 새 이름은 김신아新牙-새 신, 움 아', '나는 행복한 사람'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고 그 이름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갔다. 일본어 자서전 '돌멩이들의 외침'과 수상록 '두어라 흙이라 한들 어떠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의 하나님'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다.

어느 날 새벽시간에는

사도행전 21장에서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에 겪은 일을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며 큰 위로를 받는 장면을 묵상했다. 나도 머지않아 천국에 갈 것이고,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지나온 세상 이야기를 펼칠 때 주님이 나를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실 장면도 그려보았다. 그 은혜에 감동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새벽 눈길을 지팡이로 더듬어 귀가하면서 "아득한 나의 갈 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던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를 몇 번이고 불렀다고 소개한다.

겹겹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온 그리스도인 김신아 장로.

세상 날이 다 하므로 상처투성이 육체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갔다. 나는 그의 시신을 화장장 화로에 밀어 넣으며 '장로님, 잘 가세요...' 하고 마지막 작별을 했다. 내게 본을 보여주시고 감동을 주셨던 좋은 스승이었다. 부인 정봉희 권사는 병상에서 남편 일을 궁금해 하다가 별세 소식을 듣고 식음을 끊더니 10월 27일 별세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생애는 제게 도전이었고 교훈이었습니다. 교갱협 홈페지에 올린 글을

    여기 옮겨놓습니다. 글쓴이 황영준 목사

 

 

 

 

 

 

 

 

출처 : 하얀마을 2
글쓴이 : 하얀마을 원글보기
메모 : 예수님이 생각나는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