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부흥과개혁사, 2007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과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심리학과 경영학의 원리들을 성경의 진리보다 더 믿는 사이비 기독교 신앙이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퍼져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 존 오웬이나 로이드 존스 같은 하나님 교회의 진리의 용장들이 우리 시대에 살았더라면 분명히 심리학과 경영학에 물든 사이비 기독교와 맞붙어 진리의 검을 휘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소 누군가 우리 시대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 심리학이라는 골리앗, 경영학이라는 골리앗으로부터 우리 교회를 구출해 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형제님의 글을 읽어 본 결과 저의 소원이 일부 성취된 것 같이 큰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백금산 11-12
옥성호 형제님의 글은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더 깊이 있는 분석과 더 넓은 증거와 더 큰 호소력으로 제시하고 있어 저로서는 형제님의 글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13
차츰 읽어 가면서 놀라움으로,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십년 묵은 체증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심리학이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린 수많은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고칠 수 있는 해독제가 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아니면 심리학이라는 달콤한 꿀을 빨아먹으면서 세상 모르고 즐기고 있는 교회의 벌집을 쑤셔 놓는 격이 되어 앞으로 수많은 벌 떼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겠군요. -백금산
제게 더 큰 영향을 끼친 분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십니다.(저는 아내와 얘기할 때 그냥 앞에 아무런 호칭 없이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그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사랑하지요.) 로이드 목사님의 교리집(3권)을 읽다가 저는 비로소 기독교가 진리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 제가 순종으로 믿음에 이르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렇기에 제게는 기독교의 가르침인 교리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알고 그 이야기에 익숙한 것과 말씀을 아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실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5
기독교를 알게 된 후 자연히 교회가 회사가 되어 가고 목사가 사장이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 하루 아침에 바뀌게 된 것입니다. 17
The User-Friendly Church?
인간이든 단체든 부끄러운 것은 가리고 싶어합니다.
복음이 부끄러운 많은 교회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모티베이션(동기부여) 연설가, 세일즈맨, 코미디언 또는 무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1, 벧전 1:23을 보십시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 무엇보다 십자가가 주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갈 1:9) 18
Church marketing이 하나의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 복음을 각색해서 마케팅 하려고 하고 있다. 이 마케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음 속의 본질적인 거부감을 주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오로지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저들을 만족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교회는 외치고 있다. 고객만족! 죄인만족! 우리의 고객인 죄인이 만족할 때까지 우리는 변하겠습니다. 고객 되시는 죄인이 감동할 때까지 우리는 변하겠습니다.
제가 마케팅으로 대표되는 릭 워렌과 빌 하이벨스에 대해 공부하는 중에 발견한 것은 바로 이들의 스승이 로버트 슐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슐러를 슐러로 만든 사람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고 그 학문적 실체는 비록 심리학이지만 오늘날 그 심리학이 중심이 되어 드러나고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은 “뉴 에이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파고 싶은 것은 융을 중심으로 한 뉴 에이지의 모습입니다. 칸트로부터 시작하여 실존주의를 거쳐 오늘날 포스트모던으로 자리잡은 그 위험이 지금 교회 속에 얼마나 깊숙이 무섭게 파고들어 와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이 세 가지를 중심축으로 오늘날 교회에 파고들고 있는 사탄의 거짓말을 폭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모두 관통하는 것은 바로 뉴 에이지적 사상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로 포장된 그들(필립 얀시, 달라스 윌라드, 리처드 포스터, 유진 피터슨)의 글속에 담긴 ‘관용’의 메시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남들은 다 좋다는 <목적이 이끄는 삶>,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어디선가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가르침’에 대해 경고를 한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저는 지금 릭 워렌의 활동과 그의 가르침,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글이라는 것을 써야겠다라는 직접적 동기를 준 것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 있는 여러 목사님의 추천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약’을 ‘보약’이라고 말하며 마시게 하는 자칭 의사들에 대한 분노가 그 책을 보고 얼마나 컸는지 정말 화가 치밀더군요.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20-21
로이드 존스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교회사의 여섯 분의 영적 거인들의 계보인 어거스틴(4-5세기)- 칼빈(16세기)- 존 오웬(17세기)- 조나단 에드워즈(18세기)- 스펄전(19세기)- 로이드 존스(20세기) 중에서 맨 마지막에 위치한 분입니다. - 백금산 23
옥성호 형제의 편지를 받고 나니 이젠 옥성호 형제가 쓴 책이 아니라 옥성호 형제가 참으로 소중한 보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사실 제가 목회와 출판 사역을 하면서 보고 싶었던 후배 목회자의 모습, 또는 건강한 성도의 모습이 옥성호 형제의 생각과 삶 속에 잘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금산 29
이제 이 책이 현재 우리 교회 안에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심리학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치료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앞으로 교회가 무분별하게 비성경적인 심리학적 원리와 기법들을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백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백금산
재미있는 이야기와 감동적인 교훈으로 채운 설교는 구본형 소장과 같은 사람들의 강연과는 경쟁이 안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사님이 자기계발 전문 강연자들의 독서량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많은 교회가 세상이 이미 주고 있는 것을 또 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바로 가르치는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어 말을 잘 하는 사람의 설교가 더 인기가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현재 기독교가 처한 위기사항을 보여 주는 가슴아픈 한 단면이다.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세상과 경쟁하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성경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가 되었다. 그래서 부족한 기독교는 다른 곳에서 말씀을 도와 줄 구원군을 요청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포장하고 있다. 38
현재 부족한 기독교가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구원군 삼총사, 또는 교회 성장 전문가들이 교회 성장의 3대 필수 요소로 꼽고 있는 분야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1 심리학: 당신이 비록 성경을 잘 알더라도 만약 심리학을 모른다면 당신은 교회에서 상담을 통해 상처 받은 영혼을 치료할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다. 심리학을 모르고 어떻게 감히 인간의 심층구조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설교에 심리학적 이론들을 가미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오래된 고대의 성경 말씀을 오늘날 이 복잡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실제적인 말씀으로 포장할 수 있겠는가? 심리학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가 더 풍성해지도록 하라.
2 마케팅: 시장을 모르고 물건을 팔 수 없듯이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교회가 무슨 영향력을 그들에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당신은 왜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오는지 아는가? 그 이유를 찾아 내서 하나씩 하나씩 당신의 교회에서 그 원인을 제거하라. 그리고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원하는 필요를 파악하고 그 필요를 교회가 채워 주라. 어떤 물건이든 아주 싸든가 아니면 아주 고급 품질이면 반드시 잘 팔린다. 왜 교회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3 엔터테인먼트: 가장 큰 죄는 지루함이다. 이 인터넷과 비디오의 영상 시대에 누가 지루한 예배 속에서 한 시간 이상씩 앉아 있으려고 하겠는가? 예배도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 훈계를 하는 고리타분한 예배를 벗어 버리라. 최대한 웃기라. 필요하면 최상의 테크놀리지를 활용하여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공연으로서의 예배로 업그레이드 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이 실제로 참여해서 종교만이 제공하는 신비적 영적 체험들을 부담감 없이 느끼도록 프로그램을 짜라.
교회 속에서 심리학(정신분석과 심리상담)은 참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역은 설교와 내적 치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상담 영역이다. 설교가 성경의 본문을 떠나 여러 감동적 이야기로 채워지도록 만든 주범은 알게 모르게 교회 속에 이미 깊이 파고들어와 있는 심리학이다. 우리는 설교의 본문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될 수 있는 설교를 얼마나 자주 목격하며 살고 있는가?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영혼이 그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받아 자신감을 찾아 힘차게 살아가라는 감동적 이야기들로 채워진 설교 속에 성경 말씀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는 ‘자존감 회복’의 복음은 더 이상 교회와 세상 사이의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 고 있는 한 사례이다. 입으로는 성경이 완전하고도 충분하다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성경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01 심리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1) 과학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어떤 가설에 대한 반복적 실험이 가능해야 하고 그 실험 결과가 항상 동일하게 나올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p. 50
“어떤 이론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 이론과 관련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에 대한 분류와 관찰에 근거해서 미래에 그 관찰 주제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예측 가능하며 조정이 가능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분석 결과에 따라 동일한 결과가 미래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해야만 한다.” p. 53
2)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
“심리학은 동일한 결과의 반복적 발생에 대한 보장은 고사하고 관찰 대상의 미래 행동에 대해 ‘전혀’알지 못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저 ‘추측하고 추리’할 뿐이다. 자신의 이론대로 진행되기를 믿고 바랄 뿐이다.…심리학이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는 대부분 관찰 대상자의 ‘주관적 이야기 또는 고백’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전혀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는 그 관찰 대상자가 과연 진실을 얘기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을 진실로 알고 얘기를 하는지 아니면 아예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심리학이 개발한 수많은 이론의 바탕이 되는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은 데이터 수집과 관련해서 데이터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 외에 또 하나의 문제는 관찰자 역시 데이터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각각 다른 해석을 하고 데이터를 자기 마음대로 제각각 분류할 수 있다는 점이다.” pp. 53-4
심리학은 수도 없이 다양한,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 이론들이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믿음의 영역’이다. 이처럼 심리학은 진화론과 별로 다르지 않다. 심리학도 진화론 못지 않게 ‘믿음’을 필요로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심리학이 과학이기는 커녕 칼 포퍼가 주장하듯 미신에 가까운 비과학적 분야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심리학이 교회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3) 인간의 정신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실험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결과가 나오는 과학적 방법의 대상은 물리적 영역에 해당된다. 만일 “우리가 심리학을 과학이라고 규정하고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정신 영역을 측정 가능한 물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 치료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정신 치료의 영역이 물리적 영역을 넘어선 인간의 정신 영역, 즉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을 인간의 뇌에 국한된 물리적 영역으로 볼 수는 없다.” p. 60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지 않은 다른 물질적 영역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해석하고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영적인 존재이다. 즉, 물질적 영역을 지배하는 과학적 법칙으로 하나님을 결코 설명할 수 없듯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 역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과학은 영적인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마인드에 해당하는 영역인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룰 수 없다. 인간의 마인드는 물리적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p. 62
4)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
“물리적 영역이 아닌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본질상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증명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심리학은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인드에 대한 개인의 의견들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심리학이 아무리 겉으로 과학적으로 들리는 용어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심리학 역시 진화론과 같이 본질상 종교일 수밖에 없다.” pp. 62-3
진화론에 ‘우연’이라는 신이 있다면 심리학에는 ‘무의식’이라는 신이 존재한다. 사실상 인간의 생로병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의지해 모든 심리학 이론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리학 역시 그 누구에게 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전능한 ‘무의식’으로 말미암아 종교로서 갖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02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는가
교회가 심리학을 기독교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며, 교회가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심리학을 일반 심리학과 차별하기 위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 심리학과 동일하다.
1)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하고 있다.
“우리는 심리학이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내가 만약 수술할 병에 걸렸을 때, 내가 아는 크리스천 의사보다 옆 동네의 무신론자 의사가 수술을 더 잘 한다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실력 있는 의사에게 가는 것은 당연하다. 주인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심리학이 이런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심리학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적인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 영역에서 발견되는 과학의 좋은 점들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고 대적해야 한다.” PP. 74-5
2) 기독교 심리학은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기초를 둔 일반 심리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날 심리학은 그 단어 앞에 ‘기독교’라는 단어를 첨가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 심리학은 일반 심리학과 전혀 다른 ‘성경 말씀에 근거한 심리학’이라고 착각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p. 77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아야 한다. “‘과연 프로이트파 또는 융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독교파 또는 성경파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의 독립적인 심리학 이론이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즉 신학교에서 기독교 심리를 가르친다고 할 때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과 관계 없이, 성경에 근거한 독립적인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p. 78
조사를 해본 결과 최소한 미국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심리학은 그 이론이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며, 본질에 있어 일반 대학에서 가르치는 심리학과 전혀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크리스천 심리학회에 제출된 한 논문은 말한다. “물론 우리는 심리학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기독교 심리학과 특별히 두드러지게 다르다고 인정받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심리학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비기독교 심리학자들과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p. 80
“표면상으로 기독교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은 자신의 이론적 배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프로이트, 융 또는 아들러를 중심으로 공부했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더 심하게 표현한다면 기존 심리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 몇 개의 성경 구절을 양념으로 올려놓은 것이 사실상 기독교 심리학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기독교 상담가들은 상담을 시작하고 끝낼 때 성경 구절 몇 개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이 비기독교 상담가와 다른 차이점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상담의 중심이 되는 심리학 이론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p. 81
3) 기독교 심리학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성경을 심리학 이론에 맞춰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이 쓰고 있는 심리학 이론이라는 안경의 색체가 너무 분명해서 그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는 순간 성경이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가장 긴급한 문제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내면의 치료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는 것을 본격적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입문 과정 또는 본 시합 전에 필요한 간단한 워밍업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 심리학의 무의식 이론은 구원의 이원화를 초래한다
심리학자 또는 상담자들은 이 무의식 세계에 대하여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무의식에 대한 맹신에서 성경적 가르침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상담에 성경 구절이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적 상담이 될 수 없다. 자동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엔진이지 바퀴가 아니다. 그 상담의 핵심은 무의식의 치료이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남으로 하나님과평화하게 되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치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자동차의 엔진은 후진국 산 엔진을 쓰고 자동차 바퀴만 선진국 산을 쓰면서 이 차는 선진국 산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무의식’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을 엔진으로 삼고 상담을 하는 이상 그 상담은 필연적으로 구원의 이원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즉 구원은 인간 치료의 입문 과정 정도에 불과하며 무의식의 세계를 치료하는 것이 진짜 전인 치료라는 식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 이 이원론의 함정은 상담 과정에서 성경 말씀을 잘못 인용하는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108
- 주서택목사의 피상적 구원관
그의 책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를 보면 무의식에 대한 기독교 상담자의 신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마음에 상처를 입힌 유리 조각들 중에서 자신이 의식하고 이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으나,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려 감지되지 못해 치료되지 않고 발병이 시작한 감염 부위처럼 계속적인 영향을 우리 삶에 미치기도 한다.” 그는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의 결여를 꼽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피상적 구원 이해는 ‘우리가 비록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무엇인가가가 필요한 존재다.’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게 되어 결국 구원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 시몬스 목사의 피상적 구원관
그의 책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얘기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가 가진 ‘구원관’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시먼스는 구원이 내적 상처가 치료되기 전까지 우리의 내세에 대해서는 보장해주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무능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구원받는 것은 “거듭나는 것” “새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 태어나고 완전히 새 것이 된다는 것은 분명 대단히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시먼스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상담자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이런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는 구원이 그다지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경험이 아주 귀중한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립서비스다) 정서적으로 입은 상처가 곧장 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격에 손상을 받은 정서적인 문제들은 빨리 낫지 않는다. 스스로가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상처들과 혼동된 상태들을 고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 여기서의 ‘성령님이 주시는 특별한 방법’이라는 것도 최면술을 포함한 일반적인 심리 치료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좀 더 솔직했어야 한다. ‘구원과 성령 충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문제들은 프로이트와 같은 사람들이 알려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상처들과 혼동된 상태들을 고쳐야 한다’고 말이다.
- 기독교 심리학은 교회 안에 변장하고 들어와 있는 모더니즘이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모더니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기독교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으로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가지는 불변의 진리의 메시지는 그대로 간직한 채 전달방식을 현재의 언어로 현재 상황에 맞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유행하고 인기 있는 최신 사상들에게 그럴듯한 기독교 용어를 입혀 마치 그 사상들이 기독교의 진리인 양 포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6-8)
‘기독교 심리학’은 교회에 파고든 모더니즘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 심리학’은 오늘날 교회 속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고 있는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이다. 그동안 교회는 성경의 진리를 다윈의 진화론에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 왔다. 그런데 교회는 어쩌면 다윈의 진화론보다 더 교묘하고 무서운 프로이트나 융 그리고 로저스 등이 제시하는 인간 본질에 대한 심리학 이론에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 이론들에 맞추어 성경을 재해석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두렵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111
03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
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기독교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자존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기독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자기 사랑과 자기 수용을 위해 하나님까지도 수단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심리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1)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내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인가?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내면의 ‘상처 치료’이다. 심리 치료에 있어서 인간 문제 해결은 결국 자기 사랑으로 귀결된다. 시먼스의 경우 그에게 있어서 구원 또는 ‘내적 자아로까지 깊이 침투하는 구원’은 ‘자기 사랑의 회복’일 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다.……심리 치료의 관점에서는 내가 나를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던 상태가 어느 시점에서 너무 사랑스럽게 바뀌면 모든 문제는 끝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심리 치료의 핵심 과제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를 더 예뻐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pp. 116-7
심리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이 행복 달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심리학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가 나 자신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pp. 118-9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7~8).”
“성경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받은 구원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 우리는 모른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고 또한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가 결코 사랑받을 만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뿐이다.” p. 119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크리스천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심리학은 이런 크리스천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심리학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발버둥치는 심리학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 작아지는 나 자신을 목격하는 기독교가 얼마나 다른가? 이 두 가지의 가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p.120
2)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주장한다. 아니 선함까지 아니더라도 인간 본성이 최소한 중립의 상태 정도는 된다고 보고 있다.”……“심리학의 시각으로 볼 때 선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어야 할 인간이 잘못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과 관계 없이 가해진 외부의 자극들 때문”이라고 본다. p. 120
이에 반해 성경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즉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내면 전체가 죄로 물든 존재라는 것이다.……죄인 된 인간에게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치료의 방법은 심리 치료가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 pp. 121-2
3) 왜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인지를 알려면 심리치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와 융을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데에 중심이 되도록 한 점이다.
“프로이트는 꿈, 농담, 실수 행위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일반에게 각인시키고, 인간의 성적 본능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유아 성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계속해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규정하고 정신분석의 방법을 종교, 사회, 문명, 예술들의 영역에 응용하는 데 힘썼다.” 123-124
- 프로이트의 성장 배경
그는 대단한 객관적 진리를 발견했다기보다 자신의 성장 환경을 반영하는 매우 주관적인 이론을 제시했을 뿐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천재성과 위대성은 그의 이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이 아니라 개인적 선입관이 많이 포함된 매우 주관적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론을 많은 사람이 거의 진리로 인정하게 만든 그의 설득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25
1856년에 태어난 프로이트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에게서 난 자식이었으며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처가 낳은 장남 필립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필립은 프로이트의 어머니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후에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이복형 필립이 죽기를 바랐다고 고백했다. 이런 독특한 성장 환경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후에 자연스럽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착안하게 한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학문에 대한 첫 관심은 철학이었다. 그의 철학 탐구는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절정에 다다랐다. 철학을 생물학적 관점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자각을 하면서 의학을 전공했다. 루드비히 포이엘바하를 만남으로 기독교에 대해 유물론적 관점의 대부분을 확립하게 되었다.
포이엘바하는 “기독교는 사실상 인류의 이성으로부터 뿐 아니라 인류의 삶에서부터 사라졌다. 기독교는 단지 고착된 생각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하나님은 (무한한)인간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안에 존재하는 가장 (무한한) 본성이 밖으로 표출되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이 영원에 대한 자각과 갈망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반면, 포이엘바하는 인간 속에 영원함의 본성,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속에 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종교란 개인에게 있어서 억압된 충동들에 의해 문득문득 드러나는 이상한 꿈 또는 황당한 말실수가 인류 전체에 의해 확산된 형태에 불과하다. 또 동시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평가
1) 프로이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과학 발전이 이루어 낼 미래를 믿으며 영적 세계를 부정했다.
프로이트와 칼 마르크스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종교란 하나의 환상 또는 환영이라고 보았다. 또한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또 찰스 다윈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장과정 중에서 진화의 흔적을 찾아냈다.
2) 무의식의 발견은 인간 행복을 향한 중요한 시발점이 아니라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인간 실종의 시작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열망은 근친상간에의 열망, 잔혹 행위와 살인에의 열망이다.”
프로이트는 인생의 해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상습적으로 코카인을 사용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답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인간 더 나아가 인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카를 융
오늘의 기독교가 융에게 직, 간접으로 받은 영향
1) 융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2) 프로이트는 기독교를 부정한 반면 융은 기독교를 신화화했다.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융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로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망각된 기억들과 욕망들을 중심으로 그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구분했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마다 상이한 개인 무의식과는 달리 인류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 인간이 동물일 때부터 이어 내려온 잠재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인류의 각종 신화들, 종교들, 의식들, 상징들 그리고 꿈과 환상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융에게 기독교는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무의식의 잠재된 기억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단서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창조적 진화론과 기독교 심리학을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에 주눅이 들어 성경을 부끄러워한다.
이들이 양립될 수 없는 두 개의 가르침을 섞는 것은 성경만으로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문들 앞에 서면 웬지 작아지고 주눅이 드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성경이 진리다.’라고 내어 놓기가 영 부끄러운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다 파악하려면 과학이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심리학의 정신 분석 차원에서 볼 때 객관적인 인간의 ‘정상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론 체계 자체가 결코 과학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병원에 입원해야 할 중증 환자로 비칠 수도 있다.
기독교의 ‘죄’와 ‘구원’이 사라진 자리에 각종 그럴듯한 이름의 ‘병명’들만 늘어가고 있다. 이제 모든 인간은 책임질 것이 전혀 없는 ‘피해자 또는 환자’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무슨 구세주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가?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닌 치료일 뿐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부정하는 이단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교회 안에 들어온 심리학이다.
우리는 이런 거짓된 가르침을 성경의 진리와 바꾸려는 정교한 사탄의 계략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04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
심리학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자기 사랑, 긍정적 사고방식, 성공의 법칙이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
1. 심리학의 첫 번째 가면: 자기 사랑(Self-Esteem, Self-Love, Self-image)
자신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윤리적 원칙의 기준이 된다. 객관적인 윤리적 원칙에 근거하지 않는다. 나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옳고 좋은 것이며 나의 자존감을 낮추는 것은 나쁘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이 지극 정성의 자기 사랑에 따르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비판적 사고만큼 자존감에 해를 주는 것도 없다. 그러니 남을 비판하는 것, 부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 된다. 왜 비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실현(self-actualization), 자기 충족(self-fulfilment) 등의 각종 용어로 대표되는 자신에 대한 이 애틋한 자기 사랑이 기독교 속으로 들어온 지는 매우 오래 되었다.
1) 자기 사랑의 전파자들
- 카를 융(Carl Jung)
융에게 인간은 (드러나지 않은) 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존재이다. “융에게 인간이 하나의 신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며 그 표현이 사랑을 넘어 자신에 대한 숭배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p. 155
“환자들은 정신 치료사들이 사제의 역할까지 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정신 치료사가 자신들을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정신 치료사들은 신학의 영역에 속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의 제자 자코비의 말이다. “융파의 정신요법을 요약하면 치료와 구원을 의미한다. 정신요법이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과 방법을 알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자신의 존재 전체에 대한 지식과 충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모든 영적 구도의 목적이기도 했다. 의학적 측면을 제외하고 나면 융의 정신요법은 교육과 영적 인도를 위한 시스템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
융에게 있어서 정신 분석이란 의학이 아니라 종교이며 그에게 있어서 치료는 단순한 질병의 치료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었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그 구원의 모습은 인간이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겸비함으로 발생하는 ‘인간 완성’의 결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영적 추구란 인간 완성을 위해 필요한 여정이었다. 이를 위해 융은 인간 개개인마다 집단 무의식과 개인 무의식으로 구성된 자신의 무의식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무의식의 구조가 개인의 삶 속에서 의식을 통해 표출되는 표현들 간의 상호 상관관계를 파악함으로 인간 구원의 과정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역사 속에서 이 피조물의 범위 너머에 실존하시는 하나님은 개개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개념상의 신으로, 또 하나님을 아는 데에 사용되어야 할 인간의 이성과 열심은 나 자신을 알기 위한 것으로 100% 대체 되었다.
- 에릭 프롬(Erich Fromm)
1900년 독일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후 1933년 미국으로 건너온 에릭 프롬은 한국 교회 내에서 ‘사랑’과 관련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현대인의 언어에 맞게 재해석한, 마치 사랑의 전도사라도 되는 듯 잘못 알려진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사회’라고 파악했다. 사회가 인간의 무의식에 주는 영향에 대해 자신의 연구를 집중하였다.
에릭 프롬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프롬에게 있어서 사랑은 인간 스스로의 내부에서 샘솟는 것이지 어디선가에서 주어지는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인간 속에 내재된 것이며 인간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고귀한 존재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것도 아니며 또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이 (자신 밖의)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인간 고유의 힘이며 또 이 사랑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
프롬의 생각은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에 대한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프롬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반감은 너무 자연스런 결과이다. 프롬은 자신이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믿는 이론 전체가 붕괴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잠재력과 지성을 사용해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다는 (나와 같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의 주장은 인간의 내재된 본성이 악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에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 p. 160
그는 <그리스도 교리>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지배자와 기독교인들을 동지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즉, 기독교의 교리가 인간 스스로 천국을 만드는 인간의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이상 기독교인은 지도자를 의지하게 되고 그 지도자는 기독교도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게 된다고 했다. <너는 신이 될지어다: 구약 성경과 그 전통에 대한 완전 새로운 해석>이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이제 기존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반전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 신은 내 속에 존재하는 바로 그 신이며 또 동시에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속에도 존재하는 그 신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에릭 프롬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 부분과 관련하여 칼빈이야말로 인류의 전염병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p. 161
이런 에릭 프롬의 글들이 수많은 기독교 서적에 아직도 인용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나름대로 개념화한 사랑의 정의, 사랑의 종류 등은 ‘거룩한’ 인간이 드러내는 한 측면을 표현한 것일 뿐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 신으로 격상된 인간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신인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네가 신이야,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신이라고!’라는 복음을 전하라고 에릭 프롬은 지금도 무덤에서 외치고 있을 것이다.
- 칼 로저스(Carl Rogers)
정신 분석 시장에 있어서 칼 로저스의 공헌은 ‘심리치료란 일반적으로 환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필요한 것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1902년에 태어나 한때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다녔던 로저스는 그가 다니던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종교와 관련한 자유주의 철학 사상을 접한 후 기독교를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틀에 박힌 믿음들에 근거하지 않고 처음부터 시작함으로 진짜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사상을 찾아 그 사상을 통해 인간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간접적 또는 고객 중심(non-direct or client-centered)의 상당법을 개발하여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적용했다. 그는 또한 심리 치료를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며 자아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심리 치료는 더 참되고 더 완성된 자기 자신을 이루려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과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p. 162
2) 자기 사랑이 가진 오류
“첫 번째로 자기 사랑을 하나의 치료약, 다른 말로 하면 결과를 내기 위한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자기 사랑은 단순히 교회와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에서도 각종 사회 문제까지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주는 하나의 만병통치와 같이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자존감의 결여가 범죄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식으로까지 오해를 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진짜 악독한 범죄자일수록 엄청나게 높은 자존감, 자신에 대하여 엄청나게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자존감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곡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쩌면 범죄의 더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잘못 유도된 자존감은 오히려 인간이 가진 죄성을 합리화시키며 상상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사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여지까지도 있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그냥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지 강제로 심은 후 빨리 뿌리를 내리고 빨리 자라도록 하기 위해 마구 그 위에 비료를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내가 좋아.”를 반복하거나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책의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게 하는 등의 ‘조작’을 통해 강제로 생기고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사랑은 어느 날 돌아보니 전보다 더 책임감 있고 남에 대해 배려하는,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을 보고 그냥 씩 웃을 수 있는 정도면 된다.” pp. 165-6
“두 번째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 사랑이 너무 모자라서 문제라는 시각이다. 그렇기 에 이 부족한 자기 사랑을 키워 주기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자기 사랑이 부족한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지 결코 모자라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p. 166
3) 자기 사랑에 대한 성경의 경고
“성경은 자기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이라고 말하기는커녕 자기 사랑이야말로 말세에 드러나는 가장 조심해야 할 위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위의 구절에서 자기 사랑 이후에 나열되는 돈에 대한 사랑이나 자랑이나 교만이나 모두 어떻게 보면 자기 사랑에 대한 결과적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pp. 167-8
4) 성경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며 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렘 9:23~2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누리며 살라고 말하지 하나님을 아는 나 자신에 감동하며 살라고 하지 않는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닌가?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마치 내가 스스로 창조한 듯이 자랑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왜 네가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느냐는 것이다. 나의 재능과 관련해서 찬양을 받으실 분은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이시지 그 재능을 거저 받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실 수 있지만 굳이 내게 주신 것은 내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빚진 마음으로 살라고 주신 것이다. 내가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성경은 ‘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지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라고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도 바로 알게 된다. 우리가 자신을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긍지에 차서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의 ‘존재’를 하나님께 빚지고 살고 있다. 내 스스로 숨쉬고 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빚진 자’이다. 여기서 무슨 자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 스스로 감탄하는 나의 재능도 그 재능이 발휘되기 위한 존재를 하나님이 유지시키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 상황에 내가 나를 보면서 감탄할 것이 무엇이 그리 있겠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창조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진실이고 우리의 현주소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우리의 만족은 내가 나를 보면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어 낸 창조자가 아니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pp. 177-8
5) 성경은 자기 사랑이 죄라고 말한다
6) 자기 사랑이 성경적이라는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7) 나 중심의 종교가 위험하다.
“기독교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종교이다. 그 속에서 ‘내’가 강조되면 될수록 하나님은 잊혀지게 되고 기독교는 어느 새 하나님 중심의 종교에서 ‘나’ 중심의 종교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p. 181
내 귀를 즐겁게 하는 ‘자기 사랑’의 메시지를 멀리 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절실한 때이다. 존 파이퍼 목사는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도록 해주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하나님을 영원히 높여드리는 기쁨을 누리는 존재로 하나님이 당신을 자유하게 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목사는 말했다.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나의 본성을 미워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입니다.”
2. 심리학의 두 번째 가면: 긍정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
심리학은 인간의 죄 대신 인간의 병, 인간의 구원 대신 인간의 치료를 주장한다. 이러한 심리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이고 인간을 위한 메시지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메시지 중에서 하나님 중심의 메시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 회개의 메시지와 심리학의 인간 중심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화해의 여지가 없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각각의 개인은 그 속에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거대한 잠자는 거인을 지니고 사는 존재이다. 이런 존재에게 ‘회개’라니, 이 얼마나 가당잖은 가르침인가? 심리학이 제거하려고 하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희석시키기 위해 양의 탈을 쓰고 교회 속에 파고든 심리학의 또 하나의 가면이 ‘긍정적 사고’이다.
1) 긍정적 사고방식의 전파자들
현재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것이라면 무조건 따라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독인지 양잿물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갖다 마시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다. 비성경적인 긍정적 사고방식을 전파하고 있는 목사들의 생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추종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노만 빈센트 필은 ‘적극적 사고’라는 말로 사실상 심리학의 긍정적, 적극적 사고를 교회 내로 유입시킨 원조이다.”……그는 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랄인 헬러버그의 명상법은 생명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는 힘이 있다. 이 명상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해 준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신학적으로 정의되는 어떤 존재인가? 그분은 신학으로 정의되기에는 너무 크시다. 하나님은 생명 에너지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에너지이시다.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의 숨을 통해 들이마심으로써 당신은 하나님의 에너지를 마음에 그릴 수 있게 되고 당신은 새로운 에너지로 재충전될 것이다.” Noman Vincent Peale, “No more stress or tension,” in Plus:The Magazine of Positive Thinking, May 1986, pp. 22~23
하나님은 이제 하얀 안개 속의 에너지로 전락한 채 우리가 호흡을 통해 들이마시는 존재가 되었다.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라. 당연히 노만 빈센트 필과 같은 사람에게 성경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호흡법을 통한 요가 말고 그 무엇이겠는가? 그 요가를 그가 명상 기도라고 부르든 관상 기도라고 부르든 관계 없다. 왜 생명 에너지, 하나님의 에너지를 매일 마시면서 살던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었을까? p. 185
그는 1984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도 ‘신학적 생각’이라고 말하며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했다. 또 유명한 필 도나휴 쇼에서 “나는 하나님과 나만의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 당신은 하나님과 당신만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의 신도 신전을 집에 모시고 있다. 그리고 그 신도 신전에서 매일 나는 영원한 평화를 주는 마음의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지금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오염시킨 긍정적 사고의 일등공신은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이다. 로버트 슐러가 시작한 교회의 ‘수적인 성공’이 그를 일약 기독교 내에서 긍정적 사고의 대부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사실 노만 빈센트 필의 수제자이다.”p. 186
“슐러는 1926년생이다. 슐러의 나이와 관련해서 그가 출연했던 한 기독교 대담 방송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로버트 슐러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서도 참으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환으로 왜 하나님이 자신을 수많은 년도 가운데 1926년에 태어나게 하셨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하나님은 슐러의 인생이 마태복음 19장 26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장 26절이 바로 1926년이라는 논리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즉, 이 말씀을 바탕으로 볼 때 자신은 하나님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p.187
“로버트 슐러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말씀, 소위 말하는 ‘평생 말씀’으로 삼고 있는 성경 구절이 예레미야 29장 11절이라고 한다.” p. 18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슐러에게 있어 성경은 반복적으로 암송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종류의 동기부여를 주는 구절이 다수 포함된 하나의 자료집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는 슐러에게 사실상 성경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과 분열하고 구별하게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는 분열적 교리라고 부르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의 대담한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긍정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분파적인 종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환상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주요 종교들의 지도자들은 각각의 종교가 주는 교리적 특징을 벗어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함께 힘을 모아 평화와 번영 그리고 희망을 이 세상에 전하도록 해야 한다.”<나의 여행: 아이오와 시골에서 꿈의 성전까지>
이 글을 보고 감동을 받는 분이 계시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분은 어쩌면 크리스천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신분은 얻을 수 있겠지만 크리스천만은 되지못했을 수 있다. 그리고 저는 이 글을 진심으로 쓴 로버트 슐러는 결코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유일한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그가 크리스천인가요? 개별 종교적 당파성을 벗어나 모두 손을 잡고 하나 되자고요? 하나가 되어 다 같이 죽자는 소리인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미국의 여가수 마돈나의 말이다. “영성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고 종교는 포용이 아니라 나누고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구별이라는 단어가 바로 종교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영성은 추구하지만 종교는 거부합니다.”
슐러의 주장이 마돈나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뉴 에이지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뉴 에이지의 주장을 한 마디로 하면 ‘나도 신, 너도 신, 우리는 모두가 다 고귀한 신들, 그러니 우리 모두 각자가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내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계발하고 또한 신답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가 되자!’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로버트 슐러야말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기존의 주류 교회 속에 전파하는, 실로 훌륭한 ’선교사‘인 것이다. 미국을 넘어 한국과 전 세계로 전파하는 ’글로벌 뉴 에이지 선교사‘인 것이다.
뉴 에이지의 대표적 지도자인 닐도날드 월시는 그의 책 <새로운 계시>에서 슐러야말로 “특별한 목사”로서 그의 영적 사상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영성”과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슐러가 이미 교회 속에 자존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학“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 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나는 슐러가 얘기한 국제적이고 포괄적이며 탈교리적이고 탈문화적이며 탈인종적인 기준의 신학이 다음 문장으로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다. 우리는 우리의 길이 더 나은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길은 단지 또 하나의 다른 길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영성이 주는 복음이다. 이 영성이야말로 인간을 원래의 자신으로 회복시키는 영성이다.”
슐러는 미국 내에서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뉴 에이지의 또다른 지도자인 제럴드 잼폴스키와는 함께 세미나를 열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잼폴스키는 자신의 한 책에서 자신이 인도의 영적 스승인 스와미 바바 무크타난다를 만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용히 앉아 있은지 5분 정도가 지난 후에 나의 몸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형태로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각종 색깔들이 내 주위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치 내가 나의 몸 밖을 나와 나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과거에 들은 적이 있지만 내가 믿지 않았던 현상이었다. --나는 평상시에도 항상 높은 수준의 에너지를 유지하면서 사는 편이었지만 이 경험이 있을 후 나는 세 달 동안 나의 에너지는 정말로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나는 거의 잠을 잘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깊은 사랑의 감정에 온통 차 있었다. 그 날의 그 경험은 지금까지 내가 ‘실재, 현실’이라고 부르던 모든 사실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고 보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날 나는 물리적 영역에 제한받지 않는 새로운 차원의 현실의 일부를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영성에 대한 개념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재평가하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그 경험은 내가 (뉴 에이지 정규 입문 코스인) ‘기적에의 코스’를 만나도록 하는 데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알게 모르게 미국과 한국 기독교에 끼친 로버트 슐러의 나쁜 영향이 끔찍할 정도로 거대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슐러가 설교와 저술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끼친 영향보다 미국 목사들에게 끼친 영향이 워낙 크고 깊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전부터 시작한 슐러의 ‘교회 성장 세미나’를 중심으로 수많은 젊은 목사들이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슐러의 사상을 중심으로 정착된 많은 목사들이 미국 기독교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약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몇천 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 미국에서 몇만 명 이상 모이는 교회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메가 처치들이 미국 곳곳에서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슐러의 가르침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의 역사라고요?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그것이 부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것이다.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미국 유명 목사들의 상당수가 어떤 의미에서 슐러의 직속 제자들이다. 그 사람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가장 검증된 길이다. 강원용목사의 스승은 미국의 폴 틸리히이다.
또한 우리가 이 슐러의 영향력에 대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슐러가 한국 교회에 대해서도 크나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의 유명 목사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많은 수의 한국 목사들 때문이다. 슐러의 손자들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노만 빈센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는 흘러갔거나 흘러가는 세대이다. 현재 이들의 후계자는 여러 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군계일학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조엘 오스틴이다. 조엘 오스틴의『긍정의 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이 바로 긍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인 면이 조금도 없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 127)
“오스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한 확신은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데라고는 전혀 없는 하나님,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실로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단순하신데 우리 인간이 괜히 신학이니 조직신학이니 성경신학이니 하는 말들로 하나님의 그 단순한 진리를 학문화시키며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식적으로 볼 때 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복잡한 과정들, 선지자들의 예언,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초대 교회의 순교등을 거치셨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그냥 ‘하나님은 긍정적이시며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존재하실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스틴이 자신의 설교에서 죄니 십자가니 하는 주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눈을 감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pp. 199-200
오스틴은 사라가 이삭을 가지게 된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라가 실제로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아이를 마음에 품자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지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났다. 나는 이삭이 더 빨리 태어나지 못한 주 원인, 즉 약속의 실현이 그토록 오래 지연된 이유가 사라의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중략……하지만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의 작은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마음 상태가 복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 온통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두려운 사실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자칫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평생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p. 97~98 )
“조엘 오스틴에 따르면 사라가 가졌던 애초의 불신앙은 하나님이 아무리 이삭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가 없도록 만든, 하나님을 뛰어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인내를 가지고 사라가 ‘제발’ 믿음을 가져서 당신이 하신 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제발’ 실현될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셔야만 했다. 마침내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기회가 왔다. 마침내, 마침내, 사라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비로소 채워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는 존재이니 우리 스스로를 위해 또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조엘 오스틴의 주장이다.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을 이렇게 고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불쌍한 하나님을 당신과 내가 도와 드려야지 누가 돕겠냐는 것이다.” p. 205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약속의 실현 여부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에 달려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마치 사라가 당연히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간주하고 그런 약속을 하고 계신다. 나이 많은 사라가 행여 믿음을 가져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행여 이 사라가 이삭을 순산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믿음을 못 가진다면 또 어떻게 되는가? 이삭이 태어나다가 산모와 태아가 다 죽으면 어떡할까? 사라가 순산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 p. 206
“조엘 오스틴 믿음 이론에 따르면 사라의 신앙 상태에 따라 이삭은 사라가 80세에 나왔을 수 있었고 아니면 150세가 되어서야 나왔을 수도 있다. 계속 사라가 믿음을 안 가지는 것에 대비해 아마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라가 죽지 않고 계속 살도록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중요하지만 사라의 믿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라의 믿음과 관계 없이 이삭이 나왔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은 이삭이 그 때 태어나도록 계획하셨고 그래서 그 때에 태어난 그것이 사라의 의지와 믿음에 달려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pp. 207-8
그의 설교의 일부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말의 힘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부정적인 말이 하나님의 계획을 멈추게 할 수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말함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죽음과 삶은 당신의 혀에 달려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는 말은 바로 예언이 되고 바로 성취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말로 미래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것들을 부르십시오. 승리를 부르십시오. 건강을 부르십시오. 행복이 넘치는 삶을 부르십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 당신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오스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도 한국 출판계를 비롯한 우리 한국 기독교가 오스틴에게 쏟는 사랑과 존경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스틴의 가르침을 마치 성경의 핵심 진리인양 떠받드는 수많은 한국 목회자와 성도가 있는 한 나 같은 사람 한 명 정도가 조엘 오스틴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위험의 대상’으로 본다고 해서 이 친구에게 무슨 큰 해가 되겠는가? 그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 227
나폴레온 힐
그의 책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로 자라나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아직까지도 자기계발 분야의 최고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이다. 힐은 그의 책 서문에서 자신이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한 존재가 자신의 “위대한 스승들”이라고 부른 영들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영들이 수천 마일의 바다를 건너와 자신에게 지혜의 보고를 열어 자신으로 하여금 그 말들을 받아 적도록 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의 존경스런 형제라고 알려진 이들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종교들, 철학, 도덕, 물리적, 영적 그리고 육신적 지식의 자원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인내를 가지고 인류를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영적 성숙의 단계로 그리고 궁극적 깨달음의 단계로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힐은 적극적 사고 방식을 바탕으로 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노만 빈세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와 같은 사람들이 이 사람으로부터 실로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힐이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이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존재가 카를 융에게는 필레몬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영적 존재,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귀신들에 불과하다면 그와 같은 사람에게 영향받은 크리스천은 도대체 어떤 존재라는 것일까요?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폴레온 힐이 “적극적 사고를 가지고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슐러나 오스틴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말이 전혀 다른 말 같아도 사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라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 오늘날 교회에서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으면 문제아로 찍힌다
오늘날 교회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면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무조건 칭찬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말하라. 비판은 ‘미성숙’의 산물이요, ‘은혜 없음 또는 아직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산물로 취급될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지닌 사람은 부정적 사람, 조금 나아가서 그 사람은 마치 전염병을 옮기는 바이러스와 같은 취급을 당할 것이다. 교회 내에서 손꼽히는 ‘문제아’로 낙인찍힐 것이다.
잘못된 것도 당연시 여기고 고쳐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그냥 모두 웃으면서 넘어가는, 너무 긍정적인 바이러스를 옮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바이러스 역시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튼 긍정적인 사고는 이제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복음’ 만큼이나 ‘확고한’ 개념으로 교회 내에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외치는 설교가 넘쳐나고 있다.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부정적인 분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분야, 아니 성경이 도리어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분야를 성경의 핵심인 양 가르치면 결국 설교는 긍정적 동기부여로 끝나고 만다. 교회가 말씀의 본래 의미를 바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할 때 성경의 말씀 역시 수많은 세상의 가르침과 더 나은 효과를 놓고 경쟁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부자 청년에게 꼬투리를 잡아 그 친구를 실망시키고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너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지 않는가? 매일 긍정적 언어로 도배해도 모자랄 판에 예수님은 아예 자신의 처지를 공중의 새와 여우의 굴과 비교할 정도로 부정적인 언어를 일관되게 사용하셔서 제자 되고자 하는 일부 사람들을 거절하셨다. 제자들에게도 기회만 되면 당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부정적 미래를 계속 반복하셨다. 예수님은 멀쩡하게 잘 서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도 저주를 퍼부으셨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이다 25장까지 진행되는 긴 설교에서 우리 인류의 미래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하셨다. 분명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라는 긍정적 선언을 통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다져가는 베드로에게 격려를 하고 북돋아 주지는 못할 망정 ‘너는 분명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그의 신념에 찬 물을 끼얹으셨다.
사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상 긍정적 사고와는 가장 거리가 먼 가르침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끊임없이 가해진 예수님의 저주와 악담은 도대체 무엇인가? 베드로를 책망할 때 아예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고, 눈과 팔이 잘못하면 아예 눈을 빼 버리고 팔을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게 긍정적인가요? 사복음서를 통틀어 볼 때 예수님의 어떠한 가르침과 행동도 지금 마치 진리인 양 둔갑하여 돌아다니는 이 긍정적 사고와 긍정적 언어 사용과 융합될 수 있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바울도 부정적인 사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얼마든지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베드로의 실수를 사람들 앞에서 지적하고 망신을 준다.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하나님은 가장 부정적인 분이고, 사탄은 가장 긍정적인 존재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진단한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인간과 그 죄를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과 그 죄를 100% 책임지고 처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다. 죄인 된 인간 속에 무슨 긍정적 요소가 있는가? 기독교의 가르침은 철저히 인간의 자존심과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 진리의 본질 자체가 긍정적 사고와는 결코 융합할 수 없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메시지, 기독교의 진리와 긍정적 사고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도저히 발을 맞출래야 맞출 수가 없는 양극단의 대비되는 메시지이다.
성경 속에서 매우 긍정적인 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긍정의 화신’ 사탄이다. 사탄은 하와에게 “너는 죽지 않아. 걱정하지 마, 죽기는 거녕 너는 하나님이 될거야”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문제와 비극은 이 긍정적인 선언이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하와와 아담은 사탄의 긍정적인 메시지와 하나님의 진리를 맞바꾸었다.
-긍정적인 사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두 가지 자기모순
1) 인간은 결코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긍정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약을 하는 아이를 보는 부모, 중요한 계약에 있어서 상대방의 선의.
2) 누군가에게 긍정적이 되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이미 부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왜 긍정적이 되라고 상대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이는 마치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가진 자기모순과 같다. ‘절대 진리는 없다’라는 그의 주장 자체가 하나의 ‘절대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상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신념에 더 철저한 법이다.
-긍정적 사고방식은 성경을 왜곡한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휘몰아치는 이 긍정적 사고의 광풍이 주는 비극은 우리 크리스천이 우리의 조상 아담부부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를 버리거나 왜곡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심리학 이론을 성경과 접목하려는 순간 나타나는 성경 왜곡의 필연적 결과가 긍정적 사고와 관련해서도 당연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를 바로 보고 전하려는 이상 우리는 긍정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긍정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긍정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일 수 없다.
-디모데후서 3:16은 심리학이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반성경적임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긍정적 사고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교훈은 교리로 번역해야 한다. 요즘 교회의 특징은 교리를 무시하고 교리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아예 전통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교회같지 않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성경의 첫째 목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즉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교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가 오늘날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둘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책망하는 것이다. 설교가 코미디가 되고 예배가 감동적 노래를 반복해 부르는 노래 모임으로 전락할 때 말씀의 진리 앞에서 내가 책망받는 모습을 교회에서 찾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왜 꿈이 없으세요?” “왜 여러분이 가진 그 큰 가능성에 못 미치는 생활을 사십니까?”하는 책망을 가장한 ‘아부’성의 책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성경의 목적은 그 책망을 통해 진리 앞에서 바르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의롭게 자라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 성경은 긍정적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진리를 위한 싸움’을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3)
- 교회사의 참된 설교자들은 오늘날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외치는 설교자와는 다르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본성이 죄악 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바울이 성경에서 말하듯이 당신이 ‘죄로 죽은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존스 목사님은 오늘날 설교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증거는 무엇보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말씀이 듣는 이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도록 하는, 성령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역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번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놓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앞에 앉혀 놓고 그들을 달래 주고, 위로하며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설교는 결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시는 설교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스펄전은 말했다. “이 세상이 계속 존재하는 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 단지 위로자로서의 성령 하나님 아니,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존재로서의 성령 하나님 말이다. 이 죄악된 세상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하시는 그런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 진정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필수적인 특징이 있다: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아픔이 있다. 그리고 그 죄를 놓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구원에의 갈망이 있다. 그는 내면에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한다. 이와같은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고 보기 어렵다.”
- 긍정적 사고방식은 성경이 말하는 자족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심리학적인 이유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은혜와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족과 감사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 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감사의 삶은 심리적으로 인간의 선함을 믿고, 자신을 사랑하며 긍정하는 데서 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결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감사하는 것이지 심리학적으로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 긍정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자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감사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 긍정적 사고방식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능력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무서운 적이다. P 254
3. 심리학의 세 번째 가면: 성공의 법칙
“자연주의 종교에 따르면 당연히 인간도 자연의 일부, 즉 신의 일부이다. 이 세상의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그 신성을 활용하면서 신처럼 능력 있게 살아가는 인간과, 자기 속에 있는 신성의 능력을 모른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나뉠 수 있다. 즉, 자신이 백조인데도 오리인 줄 알고 미운 오리가 되어 사는 사람들과 백조가 되어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p. 257
“자연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또는 생각이 현실을 창조한다.’라는 법칙이다. 즉,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된다는 마음(mind)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안 된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 속에 어떤 현실을 품는 것이 실제 일어나는 현실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p.258
-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방법은 말과 상상이다.
1) 성공의 법칙 1: 말한 대로 된다.
성경은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말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예를 들면서 마치 우리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이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지키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말이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p. 263
-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법칙 1: 주문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말의 첫 번째 종류는 힌두교에서 흔히 만트라(mantra)라고 부르는 무의미한 말의 반복, 우리말로 하면 주문이다.” p. 264 만트라를 통한 수행의 모습은 여덟 살 때에 이미 힌두교의 요기(요가의 달인을 일컫는 말)로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서 스승으로 추앙받던 사람이 자신이 여덟 살 때 했던 전형적인 수행의 모습을 적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의 정통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주문 그 자체 속에 어떤 신성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문은 그 자체로 그 주문이 요구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가야트리 만트라는 정확하게 반복함으로 또 매일 태양을 향해 바른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문은 현실이 된다고 믿었다.” p. 265
- 기독교 안에 스며든 주문
저자는 오늘 우리에게 심각한 것은 인격체이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내에서도 이런 주문의 위력을 신봉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몇 달 전 참석했던 한 새벽기도회에서 강단에 혼자 앉은 담임 목사가 30분이 넘도록 “인 치시옵소서.”라는 말만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꼭 “특별한 억양과 발음을 포함한 이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것을 통해 주문 같은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 정확히 알려 주고 있다. 예수님이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 즉 기도를 의미 없는 반복, 주문처럼 하지 말라는 점이었다.” p. 269
- 현실을 만들어 내는 말의 법칙 2: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현실을 만들어 내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말의 두 번째 종류는 ‘긍정적인 말’이다. 단순한 긍정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말의 사용이 이 법칙의 핵심이다.” p. 271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말의 사용은 교회 내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로 둔갑되어 사용된다.……그 믿음이라는 말 속에 사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피조물의 믿음이 아닌 성공의 법칙을 알고 활용하는 지배자의 믿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p. 271 조엘 오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억하라. 우리의 하는 말은 바로 예언이 되고 바로 성취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당신의 말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것들을 부르라. 승리를 부르라. 건강을 부르라. 행복이 넘치는 삶을 부르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 당신의 현실이 될 것이다.” p. 272 Lskewood Community, 2005. 6. 28
조엘 오스틴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의 여부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요 15:7) ‘하나님은 인간의 혀에 놀아나는 그런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말 또는 말하는 특권을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께 명령하듯이 하는 말을 기도와 믿음이라는 단어로 아무리 포장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말한 대로 된다고 하는 말의 법’이 결코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도 없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도 없다.” p.285
2) 성공의 법칙 2: 상상하는 대로 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동기부여 연설가이자 저술가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우리 속에 작게는 우리 주변의 환경, 크게는 우주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p. 286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라! 그러면 그린 대로 된다.’, ‘꿈을 꾸라! 그러면 꿈대로 된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러면 목표한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내용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성경적인 것처럼 설교되고 있다.” p. 296
저자는 한 실례로서 얼마 전 여호수아 18장 1~10절을 바탕으로 국민일보에 “축복 그림을 그려라.”는 제목으로 실린 설교 일부분을 소개한다.
“……중략……그녀가(오프라 윈프리) 오늘 최고의 성공자가 된 것은 성경을 통해 꿈을 갖게 됐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공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의 그림을 그리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중략……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며 자신 있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멋지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살고 사업 계획을 그리고 꿈꾸며 이루었습니다.……중략……. 성도 여러분, 행복을 결단하십시오. 축복의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리십시오. 하나님은 약속대로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이 함께 하는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pp. 296-7 국민일보 2007년 3월 6일자 31면.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라는 공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심리학의 상상기법의 공식일 뿐이다. 위대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소개되는 오프라 윈프리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쇼와 잡지를 통해 뉴 에이지 사상의 주요 사상가들을 미국인의 일상 삶 속에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들도록 만들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인들이 기독교와 뉴 에이지가 무엇이 다른지 전혀 구별하지 못하도록 혼동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우리는 윈프리가 한 말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더 귀를 귀울여야 한다. 왜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프로이트나 나폴레온 힐과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진리인양 떠드는 오프라 윈프리의 말을 성경보다 더 중요시하는가? 참으로 가슴 아프고 통탄할 일이다.
- 성경이 말하는 바른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상상기법과 관련해서 가장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단어는 ‘비전’ 또는 ‘꿈’”이라는 단어를 꼽는다. “상상기법에서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라.’라는 내용이 요즘은 교회에서 ‘꿈을 가지라.’, ‘비전을 품으라.’라는 말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비전과 꿈을 좋아하는지 꿈과 비전이 들어가는 교회 이름이 많이 생기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꿈과 비전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꿈과 비전을 품는다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교회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다. 개인의 꿈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성공’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교회 성장의 비전은 기업 확장의 비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비전을 품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의 비전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인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참된 교회, 참된 크리스천도 비전과 꿈을 가진다. 그러나 참된 성도의 비전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비전이다.” pp. 298-9
그렇다면 성도들이 가져야 할 참된 비전, 참된 꿈은 무엇일까? 저자는 에드워즈를 통해 우리가 품어야 할 꿈과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비전이라고 말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즉, 실존적인 하나님 체험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을 자기 신학의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체험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절정이었습니다.” p. 299 백금산 편저,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부흥과개혁사, 2003, p. 154.
“자신의 욕망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서 말과 상상이라는 기법을 통해 이 비전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말한 대로 된다.’ 혹은 ‘상상한 대로 된다.’는 성공의 법칙을 주장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p. 300
- 성공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 종교에 깊게 물든 기독교
“말과 상상력이라는 성공의 법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살펴본 힌두교 구루의 말처럼 이 세상에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이 나은 사람에게 겉으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병이 치료되는 성공의 법칙을 알고 적용한 사람에게 ‘병 고침’이란 하나님이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연히 반응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즉, 믿음을 발휘하는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에 불과한 하나님을 부르는 이들에게 무슨 기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공식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네가 신이 된다.’는 노골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가르침이나 ‘믿음을 발휘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는 식의 잘못된 기독교 가르침은 포장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p. 301
- 자연주의 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이다
종교는 인류 전체에 퍼진 ‘신경증’‘인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 때문에 만든 창작물이라고 말한 프로이트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자연주의 종교야말로 인간이 ’창조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 심리학은 대표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하나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이 원초적인 욕망에 이론적 토대를 놓은 것은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이다. 심리학은 자연주의 종교와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이제 인간과 자연 사이의(단절되었던) 균형이 정상적으로 복원되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심리학이 영적 깨달음에 필요한 공헌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융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심리학은 예전부터 존재하던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들을 과학적으로 들리도록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뉴 에이지는 다가오는 시대의 가장 무서운 자연주의 종교가 될 것이다
그 이름을 ‘새로운 생각’이라고 부르든 ‘사이언탈러지(Scientology)’라고 부르든 관계 없이 이 뉴 에이지 사상들은 인간 속에 있는 신성을 깨우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같이 이들은 겉으로 ‘사랑’을 내세운다. “나도 신, 너도 신, 그러니 우리 신끼리 서로 사랑해야지 어떻게 싸울 수가 있나?”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주는 미래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 고작 200여년 전이다. 그러나 과학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았을 20세기의 전쟁들을 겪으면서 인간은 이제 과학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또다시 비과학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 비과학의 세계도 아주 그럴듯한 ‘과학적’용어들과 ‘종교적’용어들로 포장되어 인간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킬 힘은 인간의 말과 상상에 있다고 가르친다. 과거 인간은 몸으로 돌을 날라서 바벨탑을 쌓았지만 이제는 말과 상상만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바벨탑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할 우리 교회가 도리어 이 바벨탑을 세상과 함께 쌓고 있지는 않는가?
05 성경은 참으로 충분한가
기독교는 성경만으로 ‘충분한 기독교’이다.
- 심리학은 성경이 말씀하는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 대신 알 수 없는 미지의 에너지로서의 신 또는 내 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나의 모습으로 바꿔치기 했다. 또한 심리학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죄성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성경의 진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성경 말씀을 토대로 믿음을 지키고 싸워야 할 교회가 도리어 심리학을 마치 성경 외에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계시인 양 모시고 있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기 그지 없다. 교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의 가르침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말씀의 진리에 무지한 이유는 성경의 충분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성경에 대한 일반적으로 오해 3가지.
- 오해 1. 나한테 확 필이 꽂혀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첫째는 나한테 확 필이 꽂힐 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느낌이 팍 살아서 내게 꽂히든 꽂히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지는 가장 잘못된 자세 중의 하나가 바로 ‘느낌’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성경을 대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내용을 바르게 알려 하기보다 ‘올해의 말씀’이니 ‘이 달의 말씀’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 성경 한두 구절을 마치 주문처럼 취급하려 한다. 성경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온전케 하는 능력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세상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이론에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 p. 311
- 오해 2.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머리만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져서 기도를 열심히 안 하게 된다.
이것은 가장 무지한 오해이다.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의 가슴은 차가울 수 없다. “말씀과 기도와 관련된 또다른 위험한 생각은 ‘말씀은 몰라도 기도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참으로 성경이 금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 채 기도하는 것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참 28:9).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채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자기 욕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나의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모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말씀은 모른 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자신의 ‘의지력’을 마치 무슨 신앙의 훈장이라도 되듯이 자랑하는 잘못은 더더욱 범하면 안 된다.” pp. 312-3
- 오해 3. 성경의 가르침 중 상당수는 오늘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경은 고대에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유행하는 사조대로 살면서 성경의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p. 313 그러나 로마서 1장은 인간의 동성애를 지적하고 있으며 창세기 9장 6절에는 살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하나하나 포기할수록 죄와 책임은 사라지고 병과 치료가 등장한다. 그리고 병과 치료가 가득한 사회가 주는 고통의 대가를 우리의 자녀들이 고스란히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현대의 주장들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진리의 맞바꿈은 미국을 기점으로 한국의 사회와 교회 속으로 더 빨리 파고들고 있다.
죄가 무엇인가? 수많은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피조물인 내가 창조주 대신 나신의 주인이 되어 창조주가 정한 질서에 거스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 성경으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통해 진행된 사탄의 모든 공격은 사실상 성경에 대한 공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시대에 가해 오는 사탄의 이 공격이 얼마나 교묘하고 무서운지는 우리가 조금만 눈을 뜨면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매주일 듣는 교회의 설교에서는 성경 말씀이 장식품으로 사용될 뿐 2006년 최고의 화제 ‘하인즈 워드’를 비롯한 각종 이야기들로 설교의 내용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벌써 사탄의 공격에 교회가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사탄의 공격에 넘어진 시대에는 교회가 깊은 영적 암흑에 빠져 들어간다. 그러나 교회가 다시 각성되고 부흥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된다. 대표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가장 중요한 표어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외쳐야 할 것은 종교개혁의 선배들처럼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어야 한다.
-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다.
‘성경이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데 충분한가?’라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일단 성경을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깊고 넓게 그리고 간절히 읽어야 한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2-93)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나게 하면서 고통만을 주는 회초리가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생명 그 자체였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참고할 여러 자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가?
- 우리가 영적으로 성정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갖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는 복받은 시대다
지금 우리 곁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피땀 흘린 수고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다양한 좋은 성경 주석들과 사전들이 있다. 관주성경과 스터디 바이블도 있다.
-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믿고 순종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에 더 순종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짜 진리true truth’이며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경은 참으로 우리 영혼을 위해 충분한 책이다. pp. 324-5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줄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주고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인간이 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으며 또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길과 앞으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 명확히 보여 주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해 성경과 정반대 되는 진리를 가르치는 심리학의 이론에 따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충분성을 믿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며,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대로 살아가야 한다.” p. 327
글을 닫으며
저는 오늘의 기독교를 한 마디로 ‘부족한 기독교’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심리학이나 마케팅이나 엔터테인먼트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심리학과 경영학과 엔터테인먼트의 기법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교인 수를 많이 모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노하우를 상품으로 만들어 아직 교인이 많지 않은 절대다수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고객으로 삼고 판매하고 있는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다투어 개척교회나 소형 교회 목회자들은 이런 매력적인 상품을 찾아 오늘도 이 교회, 저 교회를 벤치마킹하려고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의 기독교는 심리학과 경영학과 연예 오락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전락한 듯하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오늘의 현실적인 기독교 모습을 ‘부족한 기독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저도 한때 이런 ‘부족한 기독교’ 안에서 생활하면서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줄 알고 그 안에서 즐기며, 그 안에서 안주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점점 깊이 깨달아 가면서 오늘 우리의 ‘부족한 기독교’는 사실 ‘왜곡된 기독교’이며 ‘잘못된 기독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기독교다운 기독교,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충분한 기독교’가 ‘부족한 기독교’가 된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교회의 영적 삶에 대한 충분한 진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는 앞으로 오늘의 우리 교회가 성경과 반대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가진 세상의 이론을 추종하지 않고, 또 적극적으로 이런 세상의 이론을 성경의 진리로 굴복시켜서 교회 안에서 추방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저는 현재 우리 시대 교회가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세상의 대표적인 3가지 이론 내지 사상인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로부터 교회가 자유와 해방을 얻고 성경만을 의지하는 ‘충분한 기독교’가 되는 데 작은 불씨라도 되고자 ‘부족한 기독교’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3부작의 책을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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