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전은 주전 6세기경에 세워진 그리스의 신전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으로 전통적인 도리스식 기둥이며 기둥이 하나로 된 통기둥이다. 현재는 7개의 기둥만이 서있다
주후 50~52년에 사도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러다 1858년의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현재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있는 구 고린도와 신 고린도로 나뉘어져 있는데 신 고린도에는 바울 사도를 기념하는 교회가 있다. 교회 왼쪽은 베드로 사도, 오른쪽은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고, 교회 입구 우측면에는 대리석 판에 흔히들 사랑장이라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의 1~8절까지 말씀이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 사도 바울이 18개월 동안에 복음전파를 했던 곳은 구 고린도이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여 바울의 본업이었던 장막을 만들며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파하며 지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1~4)"
고린도의 첫 번째 항구는 레기움으로 고린도 시와 그 항구인 레기움을 연결하는 긴 성벽은 전체길이가 2.5km이고 각 성벽이 1.2km로 평행으로 지어져있다. 인공적으로 바다를 두른 항구(double port)의 넓이는 460,000m2고 부두의 길이는 7km 이다. 지금은 항구의 아주 일부분이 발굴되어있다(Roux 1958: 103).
고린도의 두 번째 항구는 겐그리아이다. 고린도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론 만에 위치한다. 인공적인 이 항구는 30,000m2정도 되며 큰 건물들이 북쪽 방파제위에 우뚝 솟아있고 네 개 구역으로 된 저장 창고들은 남쪽의 인공 방파제 안쪽을 따라서 정렬되어있다.
이 두 항구를 차지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펠로포네스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6km의 넓은 지협을 실질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고린도를 고대 세계의 중요한 교차로로 만든 것이다(Strabo 8.6.20). 평지 가장자리의 경사지는 전통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함께 부유함으로 유명하고 또한 동서와 남북 무역을 통한 세금 징수를 통하여 고린도의 금고는 항상 가득 찼었다.
고린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주전 1,800년 페니키아 인들과 왕래가 있었으며 미케네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이어 에올리안 민족이 대륙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주전 1,200 년경부터 도리아 인들이 들어도기 시작하여 약 900년 경에는 문화가 도리아 식으로 바뀌었다.
주전 8세기경부터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코르푸 섬과 시실리 섬의 시라쿠사에 식민지를 확보했고, 주전 5세기 경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도시국가중의 하나였다.
페르시아 전쟁때에는 육지와 바다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고 해군력에 있어서는 후에 아테네와 겨룸으로서 실제적인 그리스의 자살이라 불리는 펠로포네소스 전쟁의 한 도발 도시가 되었다. 펠로포네소스 전쟁 이후 새로운 그리스의 패권국인 스파르타에 대항해서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스파르타, 떼베에 이은 마케도니아의 등장으로 좌절되었다.
주전 338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삘립뽀스 2세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지도자로 인정되어 아끄로고린쏘스에 마케도니아의 수비군을 주둔시켰으며 주전 243년에 아르케안 동맹에 가입하여 동맹의 수도로서의 역할도 했으나 주전 146년 밈미우스가 이끄는 로마에 점령당해 철저히 파괴된다. 주전 44년에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다시 복구되기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때에 복구되었다
서쪽 바다인 이오니아해와 동쪽의 에게해를 연결하는 이 운하는 길이 6.2Km, 폭 25m(바닥은 21m), 수심 8~10m,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약 80m로 고대 고린도인 들로부터 만들기를 계획하였으나 기술과 재정문제로 실패하고, 주후 40년경에는 이집트인들이 고린도만의 수위가 사로닉만의 수위보다 높아 운하를 만들 경우 에기나가 침수될 것이라하여 중단하기도 했다. 주후 67년에는 로마의 네로 황제가 수천명의 죄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 19세기말에 와서야 완성이 되었다.
1881~1893년까지 약 12년에 걸쳐 프랑스 기술진에 의해 완공되기 전에도 그리 크지 않은 배는 땅위로 올려 올꼬스 네온(ολκός νεών 구지 번역하자면 배를 견인하는 마차)를 이용하여 배를 옮겼으며 운하의 서쪽 끝에 가면 그 당시 이용했던 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 길을 Diolkos라 하였으며 폭은 3~5.5m이고, 주로 선실이 없는 전함을 옮겼다. 상선일 경우에는 겐그레아 부두에서 선내의 짐을 하역한 후에 배를 가볍게 하여 고린도만의 레헤온 항구로 옮겼다.
고린도인들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수호신으로 하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였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자랑하는 3가지 중의 하나인 비너스 상은 그리스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어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만 본다면 아프로디테의 완벽한 몸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지만 신화에 나타난 아프로디테의 행실은 그리 정숙하지 못한 '사랑의 여신'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5:1~2)" 의 말씀과 같이 당시 고린도인들의 문란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음란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린도인'이란 은어가 있기도 했다.
아크로폴리스(고린도의 높은 도시)라 불리는 이 곳은 해발 575m에 있고 일명'펠로포네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튼튼한 성채로 되어 있다. '에피라' 즉 관찰, 관측소, 경계라는 의미로 주전 7~6세기 경에 성채를 쌓았으며 현재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4세기 경의 축조물로 보고 있으며 성벽은 유스띠니아노스 황제 때인 슬라브 족들의 침공 이전인 주후 583~586년 경에 다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채의 길이는 2,000m에 이르며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띠의 신전이 있어 이 곳에 종사했던 제관과 천여명의 제녀에 의해서 종교라는 명목아래 자행되었던 음행이 유행처럼 번져 외국인들의 발걸음 까지도 잡아 당겼다고 한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한 때 수 천명의 무녀들이 살고 있었으며 창녀의 업을 했다. 아폴론 신전의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데 쓰인 항아리, 술병, 화병, 물병 등이 있고, 로마시대의 율리아 황제 가의 7개 동상과 신격화된 율리오스 황제의 모습, 네로의 두상, 모자이크, 치료의 신인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발굴된 조각 파편들(환자들이 신전에서 나음을 받고 신께 감사의 표시로 환부들을 받들어 봉납한 것들) 등이 있다.
(사도행전 18:10) 현지의 발음은 "코린토" 입니다. 고대 코린토 도시의 중심에 아폴론 신전이 있습니다.
보이는 산 꼭대기를 경사길을 따라 수직으로 1시간 가량 기어 올라가서, 촬영한 동영상입니다. 고대 코린토는 이 산까지 포함하는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저 꼭대기에는 AD 16세기경 오스만 추르크가 쌓은 산성이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다가 옛 겐그레아 항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에베소로 떠남) 왼쪽으로 보이는 바다와 연결되는 지점에 코린토 운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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