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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단기선교 및 성지순례 여행기

[스크랩] 트로이 유적지 (드로아) | 터키

by 서귀포강변교회 2009. 8. 24.

 

알레산드리아 드로아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현재명은 Odun Iskelesi이다. 에게 해 해안의 항구도시로서 옛 지명 이름은 ‘시기아’였고, 고대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에게 해안 북서 소아시아의 ‘미시아’(Mysia)에 위치, ‘테메도스’(Themedos)섬 맞은편에 있었고, ‘트로이’(Troy, 지금의 ‘일리움’)의 남쪽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소아시아 북서쪽에서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 주전 4세기 아티고누스(Antigonus, 알레산더의 장군중 한 명)에의하여 건설되어 주전 133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따라서 이 항구는 안티고누스의 이름을 따라 안티고니아 드로아라고 명명했다. 그 뒤, B.C. 300 경에 드라게의 ‘리시마쿠스’왕이 확장 발전시켜 알렉산드리아 드로아로 개칭하였다(드로아는 본래 고대 트로이 주변 지역의 명칭이었다.). 원래 ‘드로아’는 특색 있는 별명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을 로마의 식민지로 삼은 후에 이 도시의 통상적인 지칭이 되었다. 한 때, 이 곳은 셀류커스 왕들의 주재지였으며, 자유도시로 발전하였다. B.C. 133에는 로마 통치권 내에 들어갔고, 크고 중요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드로아는 육로로 로마로 가기 위해 마게도냐에서 네압볼리로 가는 교차점이었다. 2C 초에는 ‘이라’산에서 드로아로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수로가 건설되었고 인공적 항구 갑문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이 인공 갑문들은 ‘헬레스폰트’(Dardanelles)와 밀접한 해로의 중요한 접촉점에서 강력한 북풍을 막아주는 은신처 역할을 했다. 도로아의 해변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조금 남아 있으며 내륙에는 고대도시의 유적들이 땅 속에 묻혀 있으나 긴 성벽의 일부와 체육관, 목욕탕, 수로의 유적들이 넓은 밀밭 사이에 있다.  여기서 아시아쪽을 전도하고 싶어하던 바울이 마게도니아 사람 환상을 본 뒤 유럽으로 넘어간 지점이고, 3차 전도 여행을 거의 마쳤을 때 밤늦게까지 강론하다 위층에 졸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곳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매우 먼거리를 혼자 육지를 걸어 다음 항구(아소)까지 간 곳이다. 후에 콘스탄틴이 로마 수도를 삼으려다 비잔티움으로 결정한 뒤 도시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주후 1세기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증여한 목용탕이있으며 펴허가 된 성벽들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석조물들은 새 수도 건설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많은 폐허가 해안을 덮고있고 숲이 우거져있다.

 

트로이에서 바라본 에게해 만      (출처-  http://holyland.maru.net/)

 

트로이 유적지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지 안내문

 

트로이 난공불락의 성벽

 

트로이 난공불락의 성벽

 

트로이 난공불락의 성벽

 

복원중인 성벽          (출처-  http://holyland.maru.net/)

 

트로이목마

 

트로이목마

 

영화 트로이의 소품으로 사용했던 트로이목마

 

트로이 유물과 유적

 

트로이 유물과 유적

 

트로이 유물과 유적

 

토관과 토기 유물        (출처-  http://holyland.maru.net/)

  

발굴된 동전

 

네로황제 동전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출처 : 사랑과행복의뜰
글쓴이 : 백두-바나바 원글보기
메모 : 이처럼 자세하면서 친절한 설명이 포함된 자료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